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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8.26 22:11 수정 : 2018.08.27 12:14

석진환
사회1 에디터

기자로서 내 생각과 실제 신문에 쓰는 기사 내용이 충돌하는 일이 종종 있다. 격하게 부딪힌 적도 있지만, 대부분은 시각이 조금 다르거나 비판의 수위 등을 놓고 ‘좀 과한 게 아닌가’ 하는 정도의 엇갈림이다. 이런 어긋남을 감지하더라도 나는 대체로 소극적인 저항이나 의사표시를 할 뿐 더 나아가지 않는 편이다. 다수의 합의된 의견이, 경험 많은 선배의 통찰이, 때론 관성과 세파에 찌들지 않은 열혈 후배의 의견이 결과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는 걸 나중에 깨닫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1심 판결 이후 2주째 도심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재판이 두번 더 남았으니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더구나 이번 재판은 우리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지만 오랜 세월 외면했던 부조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뒤 새로운 판단 기준을 세우는 일이다. 여파로만 따지면 엊그제 2심이 끝난 전직 대통령 재판보다 중요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번 재판을 보도하면서 적지 않은 혼란을 겪었다. <한겨레>는 줄곧 ‘미투’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그 연장선에서 안 전 지사의 유죄를 주장하는 취지의 기사를 썼다. 무죄 판결이 난 뒤엔 ‘위력’의 범위를 좁게 해석한 법원을 날 선 어조로 비판했다.

그런데 나는 그런 기사를 다루는 중에도 한편으로 ‘정말 그렇게 강력한 위력이 작동했을까’라고 의문을 품었다. 사석에서 만난 이들이 “둘 사이가 틀어져 그런 게 아니냐”고 야유하거나, “시키는 대로 씻었다고? 지금이 조선시대냐?”라고 빈정대는 것도 반박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엔 내 생각과 신문 기사가 충돌한 것도, 엇갈린 것도 아니었고, 그저 홀로 갈팡질팡한 셈이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지금도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다만 향후 이어질 2심 재판과 뒤따르는 토론 과정에서 아래 두 가지 정도는 내내 곱씹으며 고민해보려 한다.

첫째는 위력이 존재했던 그 공간의 작동방식이다. 한때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던 김무성 의원의 공항 ‘노룩 패스’ 장면이 상징적이다. 나도 한동안 정치부 기자로 그 언저리를 맴돌며 ‘공과 사가 뒤섞여 한 몸처럼’ 위계가 작동하는 걸 가까이서 본 적이 있다. 힘센 대선 후보에게 주어지는 ‘어마무시한’ 위력이 주변 사람들을 침묵하게 하고, 그 결과 대통령과 정부가 파멸까지 간 사례를 국민들도 모두 지켜봤다. 재벌과 대학, 군·검찰·경찰 등 권위적인 조직문화가 남은 곳이 아직 많으니, 안 전 지사 사건이 별난 집단에서 벌어진 별난 사례가 아닐 수 있다.

둘째는, 미투 이후 여성들이 왜 그토록 분노하는지, 가까이는 우리 부서 후배 여성 기자들이 왜 한목소리로 안 전 지사에게 분노하는지에 관해서다. 그들을 믿고 지금껏 썼던 기사가 훗날 옳은 선택으로 판가름날 거라는 믿음을 갖는 부분이기도 하다.

최근 출간 30년을 맞은 고 신영복 선생의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여성들의 분노는 결국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그래서 피해자가 겪은 일에 공감하는 것을 넘어 자기 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일 것이다. 내가 1심 내내 갈팡질팡했던 건 ‘입장의 동일함’은커녕 ‘관찰’의 수준을 뛰어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애정’과 ‘연대’의 관계로 발전하려면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해보려 한다.

soulf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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