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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0.03 18:38 수정 : 2018.10.04 14:47

이본영
국제에디터

새것이 등장하면 헌것은 사라졌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마치 오래전 죽은 동물의 화석인 줄 알았는데 숨을 쉬며 꿈틀대는 존재들이 있다. 누군가 알아보지 못해도 곁에서 움직이는 과거의 자식들이 있다.

우리는 지금 21세기판 지주-소작농 시대에 산다. 자기가 사는 집 이외의 집을 가진 사람이 지주다. 사는 집 한채만 보유한 사람은 자작농이다. 집이 없어 전세나 월세를 사는 이는 소작농이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언제나 유한한 것으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지대 문제를 낳는 토지가 지주-소작제와 지금의 주택 소유 형태를 관통한다. 공업화·도시화를 거치면서 농토 소유 여부는 지배적 생산관계로서의 지위를 빼앗겼다. 대신 다수 대중한테는 아파트 한채를 가졌는지 아닌지가 매우 중요해졌다. 조상들이 땅 몇 마지기를 가져보려고 아등바등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는 오버랩되는 면이 여럿이다. 해방된 해인 1945년 말 조선은행 조사에서 논밭을 소유하지 못한 순수 소작인 비율이 48.9%였다. 2017년 국토교통부의 주거실태조사에서 수도권 전월세 가구 비중이 46.6%였다. 서울은 50%가 넘는다. 그때는 논밭이 없는 사람들이 반 가까이였고, 지금은 자기 소유 집에 살지 않는 이들이 반가량이다. 경제 구조가 혁명적으로 변했어도 토지에서 비롯된 문제의 형편은 비슷하다. 영어에서 ‘지주’(landlord)는 이제 주로 주택 임대업자를 뜻한다.

소유권자가 그한테 무엇을 빌리는 이보다 우위에 있는 게 자연스럽기는 하다. 1930년대 말 일본 니가타현의 한 지주는 소작쟁의에 직면하자 ‘소작인에게 고함’이라는 글로 이를 냉정하면서도 멋들어지게 표현했다. “빌리는 자와 빌려주는 자 사이의 계약에서 빌리는 사람에게 불리한 조건은 예전부터 내려온 상례다. … 만일 지주가 토지를 회수한다면 너희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당장 처와 자식들이 펑펑 울 것이다. … 곧바로 쟁의 신청을 취소하고 종전대로 계약을 체결한 뒤 벚꽃나무 아래에서 술이나 한잔 들이켜지 않겠는가.”(일본역사학연구회, <태평양전쟁사>)

핵심은 “종전대로 계약”이 힘든 현실이다. 시장 법칙이라는 명분이 급격한 가격 인상을 합리화한다. ‘법칙’은 초과이윤에 목마른 지대 추구자들의 욕심을 위장해주는 표현일 뿐이다. 오늘의 소작농인 주택 임차인들은 자작농(자가주택 보유자)이 돼보려고 아끼고 모아보지만 골대는 빠르게 뒷걸음쳤다. 서울의 여러 지역에서 20평대 값이 30평대 가격이 되고, 다시 40평대 수준으로 뛰었다. 더 고약한 것은 무주택자들이 집 한칸 장만할 꿈에 은행에 넣은 돈이 주택 투기에 동원되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할수록 제 발등을 더 세게 찍는 역설이 발생했다. 예전에 농지 가격이나 소작료가 이 정도 뛰었다면 집단 쟁의라도 발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파편화된 이 시대의 소작농들은 무력하다.

오버랩은 또 있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1일 국회 연설에서 “땀과 땅의 대결의 승자는 땀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청와대 참모들과 장관급 공직자들, 국회의원들의 35~40%가 다주택자라고 밝혔다. 이 대목에서 해방 직후 지주들의 이해를 대변한 한민당이 불현듯 떠오른다.

일제의 질서를 온존시켰다고 비판받는 미군정은 소작료 상한을 정해 남한 내 모순을 달랬다. 원조 독재자 이승만도 토지개혁으로 자작농 중심 체제를 만들었다. 지금 유상몰수 유상분배라도 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저런 세력들조차 특단의 대책을 강구했을 만큼 중요한 문제라는 점을 상기하고 깊게 고민하자는 말이다.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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