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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0.24 18:16 수정 : 2018.10.25 13:11

이재성
탐사에디터

탐사기획기사 ‘가짜뉴스의 뿌리를 찾아서’를 쓴 부서의 책임자로서 요즘 마음이 편치 않다. 에스더기도운동 등의 소송 운운 때문이 아니다. 일방적이고 퇴행적인 정부의 대응이 사태 해결을 그르칠까 걱정돼서다. 몇달이 걸려도 답을 내기 쉽지 않은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에 대해 너무나 손쉽게 대책을 내놓는 그 용감함이 두렵다.

특히 법무부가 지난주 내놓은 가짜뉴스 대책은 신속하지만 나태한 관료적 대응의 전형이었다. 대통령과 총리가 강하게 주문하자 지난 정권에서 해왔던 방식 그대로 보고서를 올린 것이다. 관료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사안의 본질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는다는 점이다. ‘개신교’발 가짜뉴스가 노리는 진짜 타깃은 난민이나 동성애자 등 소수자라는 점에서, 가짜뉴스의 본질은 ‘헤이트 스피치’(혐오 발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요 선진국과 달리 차별금지법이 없는 한국은 헤이트 스피치를 규제할 수단이 없다는 걸 주무부처인 법무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몇번의 제정 노력이 있었지만 에스더 같은 극우 개신교 세력의 반대로 번번이 좌절된 바 있다.

또 하나, 정부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손 놓고 있는 게 있다. 에스더를 비롯한 일부 극우 개신교 세력과 과거 정권의 결탁 의혹을 밝히는 일이다. <한겨레>가 유력한 증거까지 제시했는데도 국가정보원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검찰의 이른바 ‘국정원 화이트리스트’에서도 종교단체 지원 의혹은 빠져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국정원의 과거를 조사할 수 있는 정부가 그 쉬운 길을 놔두고 대증요법에만 치중하는 이유도 조직 보호를 위한 관료주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가짜뉴스로 몸살을 앓는 이유는 가짜뉴스의 파급력이 전례 없이 커져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결정도 가짜뉴스에 여론이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한다. 당시 가장 대표적인 가짜뉴스가 ‘영국이 유럽연합에 내는 분담금만 아껴도 국민보건서비스(NHS)에 일주일에 3억5천만파운드(약 5100억원)의 보너스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브렉시트 운동가들은 노동자들을 선동하려고 이 가짜뉴스를 빨간색 페인트로 버스에 써붙이고 다녔다. 현대 정치의 특징은 ‘여론(조사) 정치’라고 할 수 있는데 가짜뉴스 하나가 여론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가짜뉴스 문제의 심각성은 이미 전통적인 표현의 자유 개념을 뛰어넘는 수준에 와 있다.

다만 정부가 직접 개입하면 여러 부작용이 따르므로, 플랫폼(정보유통매체) 업계가 자율 규제에 나설 수 있도록 하는 게 좋다. 유럽연합은 지난달 27일 구글, 페이스북 등 주요 아이티(IT) 기업들과 온라인 허위정보에 대한 행동강령에 합의했다. 업계가 자율 규제에 나서지 않으면 직접 규제에 들어갈 방침이라고 밝힌 지 다섯달 만이다.

구글이 운영하는 유튜브가 미국의 우파 선동가인 앨릭스 존스의 채널을 삭제한 것도 불과 두달여 전인 8월의 일이다. 그의 유튜브 채널은 2400만의 구독자를 거느린 인기 채널이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애플도 앨릭스 존스의 계정을 없앴고, 결제대행업체 페이팔은 그가 운영하는 웹사이트의 결제 기능을 막아버렸다. 업체마다 설명은 조금씩 다르지만 주된 퇴출 이유는 하나로 모인다. 각종 가짜뉴스를 동원한 헤이트 스피치다. 수정헌법 1조가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미국이 헤이트 스피치에 강력한 대응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차별금지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부와 여당은 서둘지 말고 외국 사례를 꼼꼼히 검토하면서 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해주길 바란다.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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