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에디터 ‘불수능’ 논란으로 사교육 의존도가 커질 거라는 우려가 나온다. 고작 초등 2학년을 키우는 처지라 입시 문제가 아득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초등 3학년부터는 입시 트랙에 올라야 한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풀어 말하면 수학 사교육을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빠른 친구들은 1·2학년 때부터 다닌다는 유명 수학(사고력)학원을 추천받았다. 테스트받으려면 전화 예약을 한다는데 한달째 망설이고 있다. 영어 사교육에서 이미 한번 백기투항을 한 탓이다. 기자 연수를 다녀오느라 미국에서 유치원을 보낸 아이는 엄마의 바람과 달리 빛의 속도로 영어를 까먹었다. 안 되겠다 싶어 2학년에 올라가면서 학원을 알아봤다. 주변에 물어보고 검색을 해보니 등장한 단어 ‘빅3’! 그중 분위기가 자유롭고 아이들도 재밌어한다는 곳에서 테스트를 봤다. 그래도 마신 미국물이 몇사발인데 하던 기대와 달리 탈락. 그나마 동네에서 가까워 빅3 중 ‘빡세게’ 공부시키는 걸로 유명한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간신히 합격. 수업 내용은 요즘 영어학원들이 그렇듯 미국 교과서다. 국어(영어), 사회, 과학, 어휘 네 과목. 여기서 이 학원의 첫째 노하우(?)가 있는데 제 학년보다 한 학년 높은 교과서를 쓴다. 사회 교과서를 펼쳐보니 나도 몰랐던 미국 역사가 수두룩하다. 국어, 사회 교재는 벽돌보다 무거워 모든 아이들이 캐리어를 끌고 다닌다. 며칠 이고 지고 다니다가, 애 키 못 크지 싶어 나도 하나 주문했다. 둘째 노하우는 엄청난 숙제다. 매번 다음에 배울 챕터를 읽고 문제를 풀어오라는데, 문제가 이런 식이다. ‘주인공이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상상해서 주제와 디테일로 나눠 써라.’ 뭐라고요? 한국말로도 못 하겠는 걸 영어로 쓰라고요? 작문 숙제가 하도 많아서 담임 선생님한테는 못 물어보고 아는 학원강사한테 왜 그런지 물어봤다. “엄마들이 작문 숙제를 좋아해요. 눈에 보이니까 발전한다고 느껴지나봐.” 학원의 최종 필살기는 시험이다. 수업 때마다 네 과목을 돌아가며 시험 본다. ‘학원 시험 따위’ 하면서 그냥 보냈더니 이튿날 아침에 영어로 문자가 왔다. “아이 점수가 낮다.” 문자를 두번 받으니 열받았다. 저녁 약속을 작파하고 애 숙제와 시험 준비하러 일찍 퇴근하기 시작했다. ‘매번 숙제 검사하고 시험 보고 도대체 공부는 언제 가르치는 거지?’라는 질문을 뒤로한 채 애 숙제에 매달렸다. 이게 틀리는지 맞는지도 모르겠는 작문을 한 다음 애한테 받아쓰게 했다. 학원 과외를 시킨다는 게 뭔지 알게 됐다. 단어 시험 연습도 시켰다. “커뮤니티? 그게 뭐예요?” 묻는 아이에게 몇마디 하다 말고 “그냥 외워” 답했다. 그렇게 한달을 보낸 뒤 마음이 우울해졌다. 숙제할 생각에 퇴근하기가 싫어졌다. ‘하우데노사우니’라는 생전 처음 발음해본 미국 원주민에 대해 씨름하면서 은하계 어딘가로 정신이 날아간 느낌이 들었다. 당장 때려치울까, 그래도 몇달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망설이는데 해답을 준 건 애였다. 첫달 울며불며 안 가겠다던 아이는 둘째 달이 되면서 의외로 빠르게 적응했다. 시험을 잘 보지는 못해도 중간은 갔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시험공부를 하라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찍기 시험이어서 괜찮아요. 나는 엄마 닮아서 찍기는 잘하잖아요.” 언젠가 내가 한 말을 기억해둔 아이의 역습이었다. 초등 2학년에 익히는 찍기 기술이라니,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두달 만에 아이의, 아니 나의 영어학원 도전기는 막을 내렸다. 한달을 뭉개는 사이 수학학원 학기 시작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전화할까 말까 망설이다 하루를 마쳤다. dmsgud@hani.co.kr
칼럼 |
[편집국에서] 나의 영어학원 빅3 체험기 / 김은형 |
문화에디터 ‘불수능’ 논란으로 사교육 의존도가 커질 거라는 우려가 나온다. 고작 초등 2학년을 키우는 처지라 입시 문제가 아득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초등 3학년부터는 입시 트랙에 올라야 한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풀어 말하면 수학 사교육을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빠른 친구들은 1·2학년 때부터 다닌다는 유명 수학(사고력)학원을 추천받았다. 테스트받으려면 전화 예약을 한다는데 한달째 망설이고 있다. 영어 사교육에서 이미 한번 백기투항을 한 탓이다. 기자 연수를 다녀오느라 미국에서 유치원을 보낸 아이는 엄마의 바람과 달리 빛의 속도로 영어를 까먹었다. 안 되겠다 싶어 2학년에 올라가면서 학원을 알아봤다. 주변에 물어보고 검색을 해보니 등장한 단어 ‘빅3’! 그중 분위기가 자유롭고 아이들도 재밌어한다는 곳에서 테스트를 봤다. 그래도 마신 미국물이 몇사발인데 하던 기대와 달리 탈락. 그나마 동네에서 가까워 빅3 중 ‘빡세게’ 공부시키는 걸로 유명한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간신히 합격. 수업 내용은 요즘 영어학원들이 그렇듯 미국 교과서다. 국어(영어), 사회, 과학, 어휘 네 과목. 여기서 이 학원의 첫째 노하우(?)가 있는데 제 학년보다 한 학년 높은 교과서를 쓴다. 사회 교과서를 펼쳐보니 나도 몰랐던 미국 역사가 수두룩하다. 국어, 사회 교재는 벽돌보다 무거워 모든 아이들이 캐리어를 끌고 다닌다. 며칠 이고 지고 다니다가, 애 키 못 크지 싶어 나도 하나 주문했다. 둘째 노하우는 엄청난 숙제다. 매번 다음에 배울 챕터를 읽고 문제를 풀어오라는데, 문제가 이런 식이다. ‘주인공이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상상해서 주제와 디테일로 나눠 써라.’ 뭐라고요? 한국말로도 못 하겠는 걸 영어로 쓰라고요? 작문 숙제가 하도 많아서 담임 선생님한테는 못 물어보고 아는 학원강사한테 왜 그런지 물어봤다. “엄마들이 작문 숙제를 좋아해요. 눈에 보이니까 발전한다고 느껴지나봐.” 학원의 최종 필살기는 시험이다. 수업 때마다 네 과목을 돌아가며 시험 본다. ‘학원 시험 따위’ 하면서 그냥 보냈더니 이튿날 아침에 영어로 문자가 왔다. “아이 점수가 낮다.” 문자를 두번 받으니 열받았다. 저녁 약속을 작파하고 애 숙제와 시험 준비하러 일찍 퇴근하기 시작했다. ‘매번 숙제 검사하고 시험 보고 도대체 공부는 언제 가르치는 거지?’라는 질문을 뒤로한 채 애 숙제에 매달렸다. 이게 틀리는지 맞는지도 모르겠는 작문을 한 다음 애한테 받아쓰게 했다. 학원 과외를 시킨다는 게 뭔지 알게 됐다. 단어 시험 연습도 시켰다. “커뮤니티? 그게 뭐예요?” 묻는 아이에게 몇마디 하다 말고 “그냥 외워” 답했다. 그렇게 한달을 보낸 뒤 마음이 우울해졌다. 숙제할 생각에 퇴근하기가 싫어졌다. ‘하우데노사우니’라는 생전 처음 발음해본 미국 원주민에 대해 씨름하면서 은하계 어딘가로 정신이 날아간 느낌이 들었다. 당장 때려치울까, 그래도 몇달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망설이는데 해답을 준 건 애였다. 첫달 울며불며 안 가겠다던 아이는 둘째 달이 되면서 의외로 빠르게 적응했다. 시험을 잘 보지는 못해도 중간은 갔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시험공부를 하라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찍기 시험이어서 괜찮아요. 나는 엄마 닮아서 찍기는 잘하잖아요.” 언젠가 내가 한 말을 기억해둔 아이의 역습이었다. 초등 2학년에 익히는 찍기 기술이라니,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두달 만에 아이의, 아니 나의 영어학원 도전기는 막을 내렸다. 한달을 뭉개는 사이 수학학원 학기 시작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전화할까 말까 망설이다 하루를 마쳤다.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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