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경제 에디터 내가 사는 일산 아파트는 몇해 전부터 녹물 전쟁이 한창이다. 다들 수도꼭지에 연수기나 필터기를 달고 산다. 수억원을 들여 단지 온수배관을 통째로 교체하기도 하는데, 공사가 끝나면 ‘○○단지 온수배관 전면교체’ 축하 현수막이 걸린다. 얼마 전 일산 전체에 뜨거운 물을 공급하는 열수송관(온수관)이 터져 사람이 죽고 다쳤다. 어제는 또 서울 목동 온수관이 터졌다고 한다. 이쯤 되면 단순히 녹물 문제가 아니다. 동맥이 터졌는데 다른 핏줄 상태가 어떻겠는가. 30년 전 같은 시기에 같은 자재로 지은 1기 신도시 전체가 구조적인 문제에 봉착한 셈이다. 1기 신도시는 대한민국 베이비부머들의 성장사를 웅변한다. 한 해에 100만명씩 태어난 이 세대는 지난 30년간 대한민국 산업화·민주화를 이끌어온 주역이자, 지금도 우리 사회를 이끄는 세력이다. 숫자만큼이나 영향력 또한 크다. 지나온 발자취마다 우리 사회에 새로운 제도와 관행을 만들어왔다. 이들이 결혼해 아이를 낳을 즈음 ‘200만호 신도시’라는 전무후무한 대역사가 이뤄졌고, 건강과 노후를 걱정할 땐 전국민 건강보험과 국민연금이 시작됐다. 중년에 접어들자 법적 정년이 갑자기 60살로 높아졌다. 장기집권 탓인가, 여기저기서 시대착오적 고장음이 들린다. 정치 지향이 전혀 다른 정권이 엇갈려 집권했지만, 30년 유구한 ‘적폐’는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서로 다수당 자리를 주고받으며 공고한 기득권 양당 체제를 구축했으니, 이들에겐 여당이냐 야당이냐는 별로 큰 문제가 안 된다. 약속 대련 같은 이들의 정치는 대통령 중심의 절대권력 시스템과 관리들의 복지부동으로 이어지고, 국가 정책과 나라 살림은 서로 이권을 주고받는 흥정으로 전락한다. 거대 정당 독식 구조를 바꾸자는 개혁 주장은 소수 정치세력의 당리당략으로 치부되고 만다. 수출 대기업 시스템에서 자라나고 혜택을 받았기 때문일까, 서민 중심 경제를 설파하지만 해법은 늘 기업과 시장에서 찾는다. 정권마다 집권 초 ‘○○경제’라며 내세우는 거창한 경제 패러다임은, 그래서 마치 교회당에서 읊조리는 고해성사처럼 들린다. 김영삼 정부 말기 대형 사건·사고가 집중적으로 터진 적이 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성수대교가 두 동강 나고, 서울 아현동에선 지하 가스관이 터졌다. 수십~수백명이 창졸간에 목숨을 잃었고, 사람들은 ‘압축 성장의 부작용’을 외쳤다. 수많은 희생자들 앞에서 질적 성장에 대한 성찰을 다짐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유의 외환위기가 터졌고, 우리 사회 최대 목표는 구조조정을 통한 위기 탈출로 재설정됐다. 국가주의 개발경제는 신자유주의 모델로 대체됐고, 기업과 시장이 맨 앞자리에서 지금껏 우리의 삶을 진두지휘해왔다. 요즘에도 사건·사고가 잇따라 터진다. 걱정되는 건, 고속철도 탈선이나 고시원 화재와는 성격이 다른 사고들이다. 그제는 20대 비정규직 청년이 나홀로 작업 중에 참혹하게 목숨을 잃었고, 그 전날에는 50대 택시 노동자가 밥줄 걱정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뿐인가. 울산 현대중공업의 하청업체 직원은 몇달째 월급이 밀리자 편의점을 털었고, 경남 창원의 한 중소업체 사장은 임금 체불 걱정에 번개탄과 소주로 자살을 시도했다. 안타깝다는 위로와 공감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심상찮은 징후들이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보다 훨씬 더 효율과 경쟁의 가치를 잘 안다. 그들의 선택은 비혼과 무자녀다. ‘정규직 4대 보험’은 어쩌면 이들에겐 이미 불가능한 현실일지 모른다. 녹물이 나오는 온수관은 빨리 바꾸는 게 상책이다. honesty@hani.co.kr
칼럼 |
[편집국에서] 우리 집 녹물을 어찌하오리까 / 김회승 |
정책경제 에디터 내가 사는 일산 아파트는 몇해 전부터 녹물 전쟁이 한창이다. 다들 수도꼭지에 연수기나 필터기를 달고 산다. 수억원을 들여 단지 온수배관을 통째로 교체하기도 하는데, 공사가 끝나면 ‘○○단지 온수배관 전면교체’ 축하 현수막이 걸린다. 얼마 전 일산 전체에 뜨거운 물을 공급하는 열수송관(온수관)이 터져 사람이 죽고 다쳤다. 어제는 또 서울 목동 온수관이 터졌다고 한다. 이쯤 되면 단순히 녹물 문제가 아니다. 동맥이 터졌는데 다른 핏줄 상태가 어떻겠는가. 30년 전 같은 시기에 같은 자재로 지은 1기 신도시 전체가 구조적인 문제에 봉착한 셈이다. 1기 신도시는 대한민국 베이비부머들의 성장사를 웅변한다. 한 해에 100만명씩 태어난 이 세대는 지난 30년간 대한민국 산업화·민주화를 이끌어온 주역이자, 지금도 우리 사회를 이끄는 세력이다. 숫자만큼이나 영향력 또한 크다. 지나온 발자취마다 우리 사회에 새로운 제도와 관행을 만들어왔다. 이들이 결혼해 아이를 낳을 즈음 ‘200만호 신도시’라는 전무후무한 대역사가 이뤄졌고, 건강과 노후를 걱정할 땐 전국민 건강보험과 국민연금이 시작됐다. 중년에 접어들자 법적 정년이 갑자기 60살로 높아졌다. 장기집권 탓인가, 여기저기서 시대착오적 고장음이 들린다. 정치 지향이 전혀 다른 정권이 엇갈려 집권했지만, 30년 유구한 ‘적폐’는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서로 다수당 자리를 주고받으며 공고한 기득권 양당 체제를 구축했으니, 이들에겐 여당이냐 야당이냐는 별로 큰 문제가 안 된다. 약속 대련 같은 이들의 정치는 대통령 중심의 절대권력 시스템과 관리들의 복지부동으로 이어지고, 국가 정책과 나라 살림은 서로 이권을 주고받는 흥정으로 전락한다. 거대 정당 독식 구조를 바꾸자는 개혁 주장은 소수 정치세력의 당리당략으로 치부되고 만다. 수출 대기업 시스템에서 자라나고 혜택을 받았기 때문일까, 서민 중심 경제를 설파하지만 해법은 늘 기업과 시장에서 찾는다. 정권마다 집권 초 ‘○○경제’라며 내세우는 거창한 경제 패러다임은, 그래서 마치 교회당에서 읊조리는 고해성사처럼 들린다. 김영삼 정부 말기 대형 사건·사고가 집중적으로 터진 적이 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성수대교가 두 동강 나고, 서울 아현동에선 지하 가스관이 터졌다. 수십~수백명이 창졸간에 목숨을 잃었고, 사람들은 ‘압축 성장의 부작용’을 외쳤다. 수많은 희생자들 앞에서 질적 성장에 대한 성찰을 다짐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유의 외환위기가 터졌고, 우리 사회 최대 목표는 구조조정을 통한 위기 탈출로 재설정됐다. 국가주의 개발경제는 신자유주의 모델로 대체됐고, 기업과 시장이 맨 앞자리에서 지금껏 우리의 삶을 진두지휘해왔다. 요즘에도 사건·사고가 잇따라 터진다. 걱정되는 건, 고속철도 탈선이나 고시원 화재와는 성격이 다른 사고들이다. 그제는 20대 비정규직 청년이 나홀로 작업 중에 참혹하게 목숨을 잃었고, 그 전날에는 50대 택시 노동자가 밥줄 걱정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뿐인가. 울산 현대중공업의 하청업체 직원은 몇달째 월급이 밀리자 편의점을 털었고, 경남 창원의 한 중소업체 사장은 임금 체불 걱정에 번개탄과 소주로 자살을 시도했다. 안타깝다는 위로와 공감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심상찮은 징후들이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보다 훨씬 더 효율과 경쟁의 가치를 잘 안다. 그들의 선택은 비혼과 무자녀다. ‘정규직 4대 보험’은 어쩌면 이들에겐 이미 불가능한 현실일지 모른다. 녹물이 나오는 온수관은 빨리 바꾸는 게 상책이다.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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