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부에디터 나치의 유대인 학살 실무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은 1961년부터 이듬해까지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열렸다. 패전 뒤 아르헨티나에 숨은 그를 납치해 법정에 세운 과정이 논란이 됐지만, 그 자체로는 인간의 야만성에 관해 근본적 물음을 던진 세기의 재판이었다. 지난주 광주에서 열린 전두환 재판을 보며 그 유명한 ‘아이히만 재판’을 떠올렸다. 장소와 상황의 유사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학살 피해자의 가족과 친구, 이웃이 둥지를 튼 도시에서 열린 학살자의 재판. 전두환의 ‘광주 재판’이 예루살렘 재판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예루살렘 법정에서 아이히만이 그랬듯이, 광주 법정의 전두환도 별일 없었다는 듯 태연했다. 자신이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그곳이 ‘광주’라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었다. 사죄는커녕 보통의 양심과 염치를 가진 사람이라면 숨기기 어려운 부끄러움이나 미안함, 이런 사소한 감정마저 찾아볼 수 없었다. 1995년 내란죄 등의 재판을 앞두고 “왜 나만 갖고 그래”라고 따지던 그였다. 이번엔 “이거 왜 이래”, 좀 더 짧게 짜증을 냈을 뿐이다. 아흔살 노인이 되어서도 역시 사람은 안 변한다. 재판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그의 회고록에 대체 얼마나 고약한 내용이 실렸을까 싶었다. 책을 열다가 머리말에 있는 한없이 뻔뻔한 문장을 찬찬히 읽고선 그냥 딱 덮고 말았다. “서정주 시인은 <자화상>이란 시에서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고 읊었다. 사람들은 내가 이 글에서 투박한 육성으로 토해내는 항변과 원망과 자기자랑을 읽게 될 것이다. 나의 회고록은 참회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뒷공론을 나는 개의치 않으련다.” 서정주는 자신의 그 아름다운 시구가 이렇게 변주돼 학살자의 변명에 인용될 줄 알았을까.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1987)를 썼던 그였으니, 어쩌면 각하의 호명을 반겼을지도 모르겠다. 아이히만 재판을 직접 지켜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학살을 가능하게 한 거악의 작동구조를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으로 요약했다. 그는 아이히만처럼 평범해 보이는 이들의 ‘생각하지 않는’ 행동, 즉 사유와 공감능력이 거세된 ‘무비판적 순종’에 주목했다. 또 피해자를 자처했던 유대인 지도층의 나치 협력과 방조 문제도 헤집었다. 우리 주변 누구나 언제든 악의 공범이 될 수 있다는 성찰이다. ‘광주의 전두환’에게도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은 유효하다. 전두환은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사건을 ‘인지’하고 있으나, 자신의 쿠데타가 부른 비극을 사유하는 능력은 단언컨대 ‘없다’. 타고난 재주로 독재자에게 송시를 바친 친일 시인 서정주처럼, 전두환이 평생 ‘염치’ 없이 살도록 해준 수많은 공범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노태우는 혼자 먹었지만, 전두환은 나눠 먹었거든. 언제나 예상보다 0을 한자리 더 붙여 봉투를 주니, 만나면 인간적 매력에 빠지지.” 그동안 심심찮게 들었던 이런 전두환 품평도 실은 일상적으로 작동하는 평범한 악이었다. 최근 정치권 풍경을 보면, ‘악의 평범성’이 꼭 악행의 현장에서만 발현되는 게 아니라는 게 좀 더 분명해진다. 악의 뿌리와 연결된 이들은 가까운 역사마저 비틀고 찢어가며 집요하게 악을 부정한다. 그 결과 우리는 학살의 진실을 부정하고 5·18 망언을 일삼은 이들이 대한민국 제1야당 최고위원으로 있는 상황을 오래도록 지켜보고 있다. 독일은 75년 전 학살을 어제처럼 기억하고 또 경계한다는데, 우리는 40년이 채 안 된 역사마저 부정당하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40년 전 역사를 훼손해도 아무 일 없으니, 급기야 ‘사유와 공감능력’이 없어 보이는 그 당의 원내대표가 70년 전 친일청산의 역사마저 조롱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것도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그해, 그달에 말이다. 생각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적당히 방치하면, 평범하고 일상적인 악이 어느새 살포시 내려앉아 온통 우리 주변을 감싸게 될지 모른다. soulfat@hani.co.kr
칼럼 |
[편집국에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광주의 전두환 / 석진환 |
정치사회 부에디터 나치의 유대인 학살 실무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은 1961년부터 이듬해까지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열렸다. 패전 뒤 아르헨티나에 숨은 그를 납치해 법정에 세운 과정이 논란이 됐지만, 그 자체로는 인간의 야만성에 관해 근본적 물음을 던진 세기의 재판이었다. 지난주 광주에서 열린 전두환 재판을 보며 그 유명한 ‘아이히만 재판’을 떠올렸다. 장소와 상황의 유사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학살 피해자의 가족과 친구, 이웃이 둥지를 튼 도시에서 열린 학살자의 재판. 전두환의 ‘광주 재판’이 예루살렘 재판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예루살렘 법정에서 아이히만이 그랬듯이, 광주 법정의 전두환도 별일 없었다는 듯 태연했다. 자신이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그곳이 ‘광주’라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었다. 사죄는커녕 보통의 양심과 염치를 가진 사람이라면 숨기기 어려운 부끄러움이나 미안함, 이런 사소한 감정마저 찾아볼 수 없었다. 1995년 내란죄 등의 재판을 앞두고 “왜 나만 갖고 그래”라고 따지던 그였다. 이번엔 “이거 왜 이래”, 좀 더 짧게 짜증을 냈을 뿐이다. 아흔살 노인이 되어서도 역시 사람은 안 변한다. 재판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그의 회고록에 대체 얼마나 고약한 내용이 실렸을까 싶었다. 책을 열다가 머리말에 있는 한없이 뻔뻔한 문장을 찬찬히 읽고선 그냥 딱 덮고 말았다. “서정주 시인은 <자화상>이란 시에서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고 읊었다. 사람들은 내가 이 글에서 투박한 육성으로 토해내는 항변과 원망과 자기자랑을 읽게 될 것이다. 나의 회고록은 참회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뒷공론을 나는 개의치 않으련다.” 서정주는 자신의 그 아름다운 시구가 이렇게 변주돼 학살자의 변명에 인용될 줄 알았을까.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1987)를 썼던 그였으니, 어쩌면 각하의 호명을 반겼을지도 모르겠다. 아이히만 재판을 직접 지켜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학살을 가능하게 한 거악의 작동구조를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으로 요약했다. 그는 아이히만처럼 평범해 보이는 이들의 ‘생각하지 않는’ 행동, 즉 사유와 공감능력이 거세된 ‘무비판적 순종’에 주목했다. 또 피해자를 자처했던 유대인 지도층의 나치 협력과 방조 문제도 헤집었다. 우리 주변 누구나 언제든 악의 공범이 될 수 있다는 성찰이다. ‘광주의 전두환’에게도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은 유효하다. 전두환은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사건을 ‘인지’하고 있으나, 자신의 쿠데타가 부른 비극을 사유하는 능력은 단언컨대 ‘없다’. 타고난 재주로 독재자에게 송시를 바친 친일 시인 서정주처럼, 전두환이 평생 ‘염치’ 없이 살도록 해준 수많은 공범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노태우는 혼자 먹었지만, 전두환은 나눠 먹었거든. 언제나 예상보다 0을 한자리 더 붙여 봉투를 주니, 만나면 인간적 매력에 빠지지.” 그동안 심심찮게 들었던 이런 전두환 품평도 실은 일상적으로 작동하는 평범한 악이었다. 최근 정치권 풍경을 보면, ‘악의 평범성’이 꼭 악행의 현장에서만 발현되는 게 아니라는 게 좀 더 분명해진다. 악의 뿌리와 연결된 이들은 가까운 역사마저 비틀고 찢어가며 집요하게 악을 부정한다. 그 결과 우리는 학살의 진실을 부정하고 5·18 망언을 일삼은 이들이 대한민국 제1야당 최고위원으로 있는 상황을 오래도록 지켜보고 있다. 독일은 75년 전 학살을 어제처럼 기억하고 또 경계한다는데, 우리는 40년이 채 안 된 역사마저 부정당하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40년 전 역사를 훼손해도 아무 일 없으니, 급기야 ‘사유와 공감능력’이 없어 보이는 그 당의 원내대표가 70년 전 친일청산의 역사마저 조롱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것도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그해, 그달에 말이다. 생각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적당히 방치하면, 평범하고 일상적인 악이 어느새 살포시 내려앉아 온통 우리 주변을 감싸게 될지 모른다. soulf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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