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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05 18:19 수정 : 2019.05.05 19:14

의붓딸을 살해하고 시신을 저수지에 유기한 혐의(살인 및 사체유기)로 구속된 김아무개(31)씨가 1일 전남 무안군 한 농로에서 범행을 재연하고 있다. 2019.5.1 연합뉴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로 널리 알려진 켄 로치 감독의 연출작 중에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1994)라는 작품이 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그랬듯이 감독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인 영국 복지제도의 허상, 인간의 얼굴이 지워진 냉혹한 복지 시스템에 대해 들여다보는 영화다.

영화는 복지당국에 아이를 빼앗긴 어머니를 다룬다. 가난하고 폭력적인 아버지 아래서 자란 여자 매기는 충동적인 연애와 결혼을 반복하며 각각 아버지가 다른 아이들 넷을 홀로 힘겹게 키운다. 어느 날 외출하면서 아이들끼리 둔 집에 불이 나자 복지당국은 네 아이를 빼앗아간다. 무능했지만 아이들을 사랑했던 매기는 괴로워하다 이전의 애인들과 달리 선량하고 사려 깊은 남자를 만나 다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는다. 그러나 이미 믿을 수 없는 엄마라는 정부의 낙인이 찍힌데다 남편은 제3세계 출신 망명객인 매기의 아기는 복지기관으로 옮겨진다.

어린이날 연휴에 이 영화를 다시 떠올리게 한 건 얼마 전 의붓아버지에게 살해된 12살 여중생이다. 12년의 세월 동안 엄마와 아빠 어느 한쪽에라도 마음을 편히 뉠 곳 없이 폭력에 휘둘리다 짧은 생을 마감한 아이의 가여운 삶보다 더 마음을 짓누르는 건 아이가 여러번 구호 요청을 했음에도 그것이 결과적으로 묵살되었다는 사실이다. 아이는 열살 때 친아버지의 가혹한 폭력을 못 견뎌 아동보호기관에 직접 도움을 요청했고, 법원은 친부에게 접근금지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쉼터와 계부가 있는 친모 집을 전전하다가 지난해 계부까지 아이를 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자 법원이 아이를 보낸 곳은 친부의 집이었다. 엄마도 아빠도 이웃도 돕지 않는 상황에서 아이가 마지막으로 믿고 싶었을 국가기관이 자신을 이전에 당했던 폭력 장소로 안내했을 때 지옥 같은 집으로 돌아가는 열두살 아이의 마음이 어땠을지 나는 상상하지 못하겠다.

오래전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를 볼 때 자식들을 빼앗긴 엄마의 안타까운 절규에도 불구하고 ‘배부른 소리’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복지 시스템이 관료화되면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책임진다는 영국 복지제도는 앙상한 형식만 남은 채 인간으로서 원하는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게 이 영화의 문제의식인데 복지제도가 정착된 이후를 논한다는 게 너무 먼 나라 이야기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게 25년 전 이야기인데 이번 사건을 보면서 우리에게 과연 달라진 게 있는가 싶다.

비단 이번 사건만이 아니다. 최근 몇년 새만 해도 부모가 아이를 때려죽이는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났다. 아동학대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면서 이전보다 아동학대치사 형량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자식은 부모의 것’이라는 오랜 믿음까지 바뀌지는 않은 것 같다. 아이를 때려죽인 부모가 다른 형제 아이를 보살펴야 한다는 게 감형 이유가 되는 걸 보면 암담하다. 죽은 여중생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학대당한 아이를 다시 양육자에게 보내는 원가족 보존의 법칙은 모든 아동학대 관련 법규에 우선한다. 아동학대 시 친권박탈이 법적으로 가능해지긴 했지만 사실상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죽기 직전까지 폭력을 당해 부모로부터 분리보호를 받는 아이들이 가해자인 부모의 협박 전화를 받고 부모가 데려가는 걸 막지 못한다. 이런 현실, 삶의 가장 밑바탕인 안전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복지 현실에서 진짜 행복, 인간의 얼굴을 한 복지를 고민한다는 건 얼마나 한가로운 먼 나라 이야기인가.

4일 발표된 ‘2017년 전국 아동학대 현황 보고서’를 보면 아동보호전문기관에서 보호하는 피해아동 수는 2017년 1만8254명이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수치에 12살 여중생은 들어가 있을까. 시설에서 나와 친모에게 갔던 때라면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수치에서 빠진 아이들은 얼마를 헤아릴까. 12살 여학생처럼 학대받는 아이들 넷 중 셋이 부모로부터 당한다. 자식은 부모가 거둬야 한다는 맹목적인 신념이 사라지지 않는 한 아동법은 아이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슬픈 이야기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김은형
문화에디터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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