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27 17:12
수정 : 2019.10.28 02:36
박민희
한겨레 통일외교팀장
“문재인 대통령 각하, 좋은 거래를 해봅시다. 당신은 한반도에서 미군이 발을 빼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고, 나도 중국의 코앞에서 퇴각하는 데 대한 책임은 지고 싶지 않소. 하지만 한국이 동맹으로서 공정한 분담을 위한 기여를 대폭 늘리는 것을 거부한다면, 나는 시리아에서 했던 것처럼 한국의 우리 군대를 집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소. 그러니 터프가이가 되지 마시오, 바보가 되지 마시오. 트럼프.”
조만간 한국에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친서’가 도착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시리아에서 미군을 철수시킨 뒤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에게 보낸 것과 꼭 닮은 ‘친서’를 상상해봤다.
한-미가 진행 중인 협상에서 미국이 내년도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액수로 요구한 것으로 알려진 50억달러(약 6조원)는 한국으로선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내용이다. 미국은 전략무기 전개, 한-미 연합훈련, 미군 순환배치, 미군 군속·가족 지원 비용 등도 모두 한국이 부담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이철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밝힌 바 있다. 한-미 방위비분담금특별협정(SMA)의 틀을 훨씬 넘어선 무리한 요구다.
동맹은 미국의 패권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국은 전세계 패권을 유지함으로써 금융·군수산업·첨단기술 분야에서 막대한 이익을 거둬들인다. 주한미군 주둔 비용의 거의 전부를 한국이 내라는 미국의 요구는 한국인들이 세금으로 미국의 패권 유지 비용을 부담하라는 것이다.
한국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군 감축 또는 철군’을 위협하며, 방위비 대폭 인상을 노골적으로 압박할 것으로 우려하는 이들이 많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지자들 앞에서 부자 나라 한국이 제대로 기여하지 않는다며 주한미군 철수를 원한다는 발언을 해왔다.
자, 트럼프의 ‘주한미군 철수 친서’나 트위터가 공개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한국 내 보수 정치인들과 언론은 ‘문재인 정부가 한-미 동맹을 끝장낸다’며 요란한 여론몰이에 나설 것이다. 이미 서울 광화문 일대에는 ‘한-미 동맹 파탄’을 비난하며 성조기를 흔드는 우익세력의 플래카드가 요란하다.
침착하게 생각해보자. 지금 미국은 하나가 아닌 둘이다. 트럼프의 미국과 기존 주류 세력의 미국이 있다. 트럼프는 재선을 위해, 지지층이 원하는 해외 미군 철수 또는 “부자 나라들의 방위비 대폭 인상”이란 성과가 필요하다. 그러나 미국 주류 세력에게 주한미군 철수는 중국과의 대치선에서 스스로 퇴각하는 패권의 자해 행위다. 존 햄리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소장은 지난달 한국에서 한 강연에서 “주한미군이 한국에 남아 있는 것은 북한 때문이 아니라 중국 때문”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가치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리아에서 미군 철수를 비롯한 오판으로 중동에서 영향력이 쇠퇴하고 ‘석유-달러 거래’에 기반한 달러 패권이 타격을 받을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는 터라 미국 내에서 동맹 체제 균열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더욱 커지고 있다. 미-중 패권 경쟁으로 더욱 중요해진 동아시아 전략을 유지하려면, 미국도 한-미 동맹이 절실하다. 한국은 미국의 6대 교역국이며, 한국이 2006~2018년 구매한 미국 무기는 35조8천억원어치나 된다. 미 의회는 주한미군 병력을 2만8500명 이하로 감축하는 예산 편성을 제한하는 국방수권법을 마련해, 트럼프의 돌발 결정에 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문제는 한국 내에서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동맹이 끝장난다’고 겁을 주면서 미국의 무리한 요구를 증폭시키는 세력들이다. 미국이 원하니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도 배치했고 방위비도 대폭 올려주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도 일본이 한국을 어떻게 대하든 연장해야 한다면, 한국을 미-중 갈등의 한가운데로 밀어넣을 미국의 중거리핵미사일 배치 압박에도 곧 직면하게 될 것이다.
트럼프가 방위비 인상을 받아내기 위해 주한미군에 대해 어떤 위협을 하더라도 한국 시민들이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냉정하게 대응한다면, 무리한 요구가 멈추고 ‘공정한’ 동맹의 길이 열릴 것이다.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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