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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10 17:55 수정 : 2019.11.13 11:41

유선희 ㅣ 문화팀장

“여자라서 너무 행복해요.”

2000년대 초반 유행한, 배우 심은하가 모델로 나온 냉장고 광고 문구다. 당시 ‘가전제품은 여성용’이라는 고정관념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도 거슬렸지만, 무엇보다 ‘과연 대부분의 여성이 여자로 태어나서 행복했던 적이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이 광고 문구를 얼마 전 한 프리랜서 여성 아나운서의 <82년생 김지영> 감상평에서 떠올렸다. “여자로 살면서 충분히 대접받고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것들도 너무 많은데, 여성을 온통 피해자처럼 그려놓은 것 같아 불편했다”는 내용이다.

40대가 된 지금, 20년 만에 나 자신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본다. “여자라서 행복한가?” 여성혐오 강력범죄가 끊이지 않고 화장실 몰래카메라가 기승을 부리는 현실, 그럼에도 성범죄에 노출되면 무슨 옷을 입었냐가 도마에 오르고 때론 피해자가 꽃뱀으로 몰리는 현실, 아이를 낳으면 독박육아에 경력단절을 고민해야 하는 현실, 그 모든 것이 바뀌지 않는 한 답은 “아니요”다.

최근 영화를 보면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의 입장에서 세상은 참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얼마 전 개봉한 <우먼 인 할리우드>에서 페미니즘 영화의 대표작 <델마와 루이스>(1993)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지나 데이비스는 “이 영화 이후 많은 것이 바뀔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미디어 젠더 연구소를 설립한 그는 이후 객관적 데이터를 수집해 숫자로써 할리우드의 성차별을 증명한다. 매년 할리우드 흥행작 상위 10편 중 85%가 남성 작가의 작품이고, 1990~2005년 전체관람가 흥행작 상위 101편 중 대사가 있는 배역의 72%는 남자의 몫이었으며,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물고기나 동물 캐릭터조차 대부분이 수컷이라는 식이다.

여성으로선 처음 베를린·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안토니아 브리코의 이야기를 다룬 <더 컨덕터>는 그가 편견의 벽이 높은 클래식계에서 온갖 고초 끝에 지휘봉을 쟁취하는 집념의 과정을 그린다. 충격적인 건 “음악전문지 <그라모폰>이 2017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자 50명을 뽑았지만 여성은 아무도 없었다”라는 영화의 마지막 문구다. 영화 배경이 1930년대인데, 그로부터 90년 가까이 지난 현재까지도 클래식계의 여성차별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영화가 비추는 현실보다 날것 그대로의 현실은 더 생생한 분노를 자아낸다. 뉴스만 봐도 ‘이건 20년 전 벌어진 일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킬 만한 대목은 차고 넘친다. 2016년 공기업인 서울메트로가 ‘모터카 및 철도장비 운전’ 분야 응시자 중 최종 합격권에 든 여성 지원자 6명의 면접 점수를 수정해 불합격시킨 사실이 감사원 감사 결과 드러났다거나, <대전문화방송(MBC)> 아나운서가 ‘16개 문화방송 지역계열사의 남성 아나운서는 36명 중 31명(86.1%)이 정규직이지만 여성 아나운서는 40명 가운데 11명(27.5%)뿐인 것은 성차별’이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거나 하는 소식들 말이다.

답답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변화는 늘 현재진행형이란 점이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개봉 18일째인 지난 9일 기준으로 누적 관객수 300만명을 돌파했다는 소식도 작은 변화의 징조 중 하나다. <82년생 김지영>의 흥행 돌풍은 작품을 보지도 않고 별점 테러를 하고, 여성을 ‘쿵쾅이’로 비하하는 악플을 다는 일부 남성들의 ‘백래시’(사회·정치적 변화에 대한 반발 심리와 행동)를 가볍게 넘어 ‘여성 서사’의 현재적 가치를 증명하고 있다. 그만큼 2030 여성뿐 아니라 그들의 엄마, 그 엄마의 엄마가 겪어온 여성차별의 역사에 공감과 위로를 보내는 평범한 관객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김도영 감독은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82년생 김지영>이 전래동화처럼 느껴질 날을 꿈꾼다”고 했다. 변화의 속도가 ‘찻숟가락으로 태산을 옮기는 것’처럼 더딜지라도, 우리의 딸들 세대는 적어도 ‘여자라서 불행하지는 않은 그날’을 살아갈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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