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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12 18:02 수정 : 2020.01.13 09:31

박민희 ㅣ 통일외교팀장

자력갱생으로 난관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북한의 ‘새로운 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행간에서 북한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깊은 고민을 읽어내는 이들이 많다. 마오쩌둥이 항일전쟁 시기에 주장했던 지구전 이론과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전문가도 있다.

마오는 1938년 <지구전을 논함>(論持久戰)이라는 책자를 썼다. 일본 침략군의 기세에 베이징, 톈진, 상하이, 난징 등 주요 도시들이 잇따라 함락되던 시기였다. ‘중국 필망론’이 확산되고 한편으로는 현실적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빠른 승리를 목표로 삼는 ‘속승론’(速勝論)도 나왔다. 마오는 두 주장을 비판하면서, “섣불리 싸우지 말고 시간을 벌며 상황을 바꿔 나가면 최후의 승리는 중국에 있다”는 지구전론을 주장했다. 적이 공격해 오면 싸움을 피하며 상대의 힘을 빼는 전략적 방어에 주력하고, 힘의 균형이 이뤄지면 전략적 대치로 전환하며, 조건들이 아군에 유리하게 바뀌면 전략적 반격에 나선다는 3단계 이론이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미국의 제재와 압박이 강고하면 자력갱생으로 방어하고, 조건이 유리하게 바뀐 뒤 다시 협상에 나서자는 전략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의 대립과 협상이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미국이 안전과 발전을 보장하는 새로운 셈법을 내놓을 때까지는 흔들림 없는 지구전을 벌이겠다는 결심이다. 북한이 김계관 외무성 고문 명의로 내놓은 11일 담화에서 “일부 유엔 제재와 핵 시설을 통째로 바꾸자고 제안했던 월남(베트남)에서와 같은 협상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며 “미국이 우리가 제시한 요구사항들을 전적으로 수긍하는 조건에서만 협상이 가능하다”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올해 북한은 10월10일 당 창건 75돌, 11월 미국 대선 등을 염두에 두고 ‘유격전’ 형식으로 긴장을 고조시키면서도, 경제를 챙기며 협상의 판을 깨지는 않은 채, 트럼프 재선 이후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비할 가능성이 높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전략은 기습전이다. 이란의 전략가이자 군 최고 실세였던 가셈 솔레이마니 쿠드스군 사령관을 돌연 드론으로 표적 암살했다. 탄핵 정국에서 시선을 돌리고 지지층을 결집시켜 대선에서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계산에서 위험한 도박을 했다. 그 여파로 미국의 외교 중심이 북한에서 멀어지고 김정은 위원장이 ‘핵을 포기할 경우 위험해진다’는 확신을 얻어 핵 협상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관측이 나오자, 이번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돌연 ‘김정은 위원장 생일 메시지’를 문재인 대통령이 전달해달라고 했다. 당분간 이란 사태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에서 북한을 관리하려는 것이다.

트럼프의 기습전은 예측불허, 변화무쌍의 전술로 상대의 허를 찌르고 자기 뜻대로 판을 바꿔가는 듯 보이지만 장기적 목표를 일관되게 추진할 것이란 신뢰를 갖기 어렵다. ‘강한 대통령’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과 ‘미국 밖의 일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두 모순이 충돌하면서, 미국의 쇠퇴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한국의 전략이다. 문재인 대통령-김정은 위원장-트럼프 대통령의 ‘톱다운 협상’과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 비핵화를 진전시킬 수 있다는 희망에 외교 역량의 대부분을 투입했지만 기대했던 결과는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동안 중국·일본·러시아 등 주변국 외교에는 제대로 역량을 투입하지 못해 역풍도 맞았다. 미국과의 조율에 너무 신경 쓰다 남북관계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청와대가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보낸 생일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공개한 바로 다음날, 북한이 “남쪽이 호들갑 떨며 끼어드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라고 한 것은 아프다.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남북관계 진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구상을 밝힌 날,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남북관계 추진은 미국과 협의해야 한다”며, 주권국가인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승낙’을 받아야만 남북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 더이상 미국의 ‘승낙’에만 얽매이는 외교로는 돌파구가 없다는 명백한 교훈으로 읽어야 한다.

외교 상대들의 전략과 정세의 판은 바뀌었는데, 한국은 낡은 전략과 진용을 고집하는 오류를 이제 끝낼 때다.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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