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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06 18:03 수정 : 2006.06.09 16:15

권용립 경성대 교수·국제정치

세상읽기

5월 마지막 날 있었던 지방선거는 “대통령의 수준을 따라오지 못하는 국민”의 배신도 아니고, 진보에 대한 보수의 반격으로만 치부하기도 어렵다. 시기적으로 중간평가의 성격을 띠게 된 이번 지방선거를 계기로 이른바 ‘진보 콤플렉스’에 대한 불만이 터진 것으로 봐야 한다. ‘무능과 독선’에 대한 심판이기 이전에 그것을 낳은 진보 콤플렉스를 심판한 것이라는 뜻이다.

진보의 미덕은 지배 질서에 대한 저항의 패기다. 그러나 저항 세력에서 지배 세력으로 처지가 바뀌면 패기를 사려로 바꾸는 지혜 또한 발휘해야 한다. 19세기의 자유가 20세기의 보수가 되듯, 진보가 언젠가는 보수가 되고 진보가 더 이상 진보이기를 멈출 때 역사도 그만큼 진보한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저항의 책무를 새로운 진보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유연하게 ‘변절’해야 한다. 혁명과 개혁의 세계사가 입증하듯, 특정 이념과 세력만 겨냥한 저항을 정치적 사려로 전환하지 못한 진보는 모두 실패했다. 그러나 그동안 청와대와 여당은 현실을 두루 살피는 정치보다는 당장의 개혁과 저항에 충실한 것이 진보라고 믿은 듯하다. 그래서 삶의 문제를 ‘역사’나 ‘민족’과 같은 거대담론의 개혁에 종속시키는 인상을 주었다. 원론적으로 틀린 생각은 아니다. 그러나 거대 담론보다 더 다급한 일상의 ‘현실’마저 마치 개혁의 후퇴를 변명하고 개혁을 발목잡기 위한 핑계로만 보고 정치의 궁극적 책무인 일상의 삶을 꿰뚫어보는 데는 무심했다.

이번 선거의 결과를 보수의 반격이 아니라 ‘현실과 상식’의 반란으로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전문 투기꾼이 아닌 중산층까지 등을 돌리게 만든 ‘전투적’ 부동산 대책, 평준화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획일주의에 빠질 위험에 처한 공교육, 살벌한 경쟁의 대상을 ‘가장 가까운 친구들’로 설정하게 만들었다는 내신 위주의 등급 경쟁, 국회 동의로 국민 투표를 사실상 건너뛴 실질적 수도 이전으로 보이게끔 만든 행정복합도시 건설, 북한을 화해 상대로 보는 것은 좋지만 우리 노력에 비해 북한의 변화가 너무 없다는 비판에 직면한 대북정책, 느닷없이 제기하고 나선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상, 그리고 ‘차이’의 성격을 따져볼 여유 없이 당위론만 앞세운 양극화론 등, 현 여당에 호의적인 사람들조차 여당의 패인으로 열거하는 목록을 보고 있으면 이번 선거의 승패가 ‘보수의 반격’보다는 혁신 지상주의에 빠져 주위를 돌아보지 못한 진보 콤플렉스와 이에 대한 보통 국민의 반란으로 판가름 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상식의 반란까지 ‘보수’로 치부하고 배제한다면, 그것이 진보 콤플렉스다.

수십만명이 희생된 아프리카 수단의 인종 학살 참극보다 국가대표 선수의 발목 부상이 더 큰 뉴스가 되는 나라, 평가전 상대국의 국가가 연주되는 순간에도 꽹과리를 치며 ‘대~한민국’을 소리치는 이 나라의 근원적 문제는 진보와 보수를 불문하고 만연된 변방의 세계관이다. 지구라는 푸른색 행성에 함께 살아가는 다른 인간과 문명에 대해 애정과 관심을 갖는 법을 우리가 배운 적이 있었던가? 우리는 ‘세계’를 열린 시선으로 보지 않으면서 세계를 향해 우리를 보라고 부르짖는 변방 콤플렉스야말로 식민의 역사나 냉전의 기억과 함께 청산해야 할 유산인데, 명백한 적과 대상이 보이는 개혁만 진보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첩에는 ‘우리 모두의 탓’인 이런 의제는 낄 자리가 없다. ‘진보’에 대한 집착이 결국 모두의 진보를 가로막는다는 역설이다. 너무 심하게 이겨 이긴 쪽도 민망하게 된 ‘프라이드 5·31’에서 얻을 교훈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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