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8.01 19:58
수정 : 2006.08.01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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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원 일본 릿쿄대 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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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그래서 내가 그 이후로 참배하지 않는다. 그게 내 마음이다.” 측근의 메모를 통해 밝혀진 일왕 히로히토의 발언이 일본 정계를 뒤흔들었다. 에이(A)급 전범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한 것에 대한 그의 ‘분노’가 노골적으로 표현된 것이 충격파를 더욱 크게 하고 있다. 합사를 강행한 야스쿠니 신사의 마쓰다이라 궁사 등 구체적인 이름까지 거론하면서, 감정 섞인 언어가 정제되지 않고 리얼하게 기록된 메모이기에 그 신빙성이 오히려 두드러진다.
1978년에 에이급 전범이 합사된 이래 히로히토는 물론 현재 일왕도 참배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를 둘러싸고 이제까지 추측이 분분했다. 일왕이 합사에 불만을 가졌다는 사실은 간접적으로는 다른 측근들의 회상 등을 통해 전해지곤 했다. 그러나 참배 추진파들은 “참배를 둘러싼 정치권의 정략적 비판과 논의가 천황 참배를 어렵게 했다”고 비판세력에 화살을 돌려 왔다. 이 논쟁에 마침표를 찍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타난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추진세력에 큰 타격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원래 야스쿠니 신사가 일왕의 이름으로 쓰러진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시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일왕 자신이 참배하지 않는다는 것이 위선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전쟁을 최종적으로 승인한 것도 히로히토 자신이며, 더욱이 일본의 전쟁 책임이 전부 에이급 전범에게 씌워진 대가로 히로히토에게 면죄부가 주어진 것도 사실이다. 히로히토의 ‘분노’가 어떤 논리와 내용을 가진 것인지는 깊은 검토가 필요하다. 다만 특히 미국에 대한 전쟁 등 ‘무모한 전쟁’으로 끌고 간 군부와 강경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은 크게 두드러진다.
이 메모를 특종 보도한 것은 〈니혼게이자이신문〉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신자유주의적 개혁노선은 전면적으로 지지하면서도, 야스쿠니 참배로 말미암은 외교마찰과 복고주의적 경향을 우려해 온 재계의 태도가 배경에 있는 것은 물론이다. 9월로 임기가 끝나는 고이즈미 총리가 자신의 공약대로 8월15일 ‘종전 기념일’에 참배를 강행할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 일왕 발언이 보도된 이후에도 고이즈미 총리의 완고한 자세는 변함이 없다.
특종 보도의 과녁은 오히려 후임 총리가 확실한 아베 신조 관방장관의 참배 저지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일왕 발언이 신문 1면 머리를 장식한 같은 날 아베 장관의 저서 〈아름다운 나라로〉가 발간됐다.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정책의 윤곽을 담은 출마선언과 공약의 성격을 띤 책자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라는 ‘북풍’에 직격탄을 맞은 후쿠다 야스오 전 관방장관이 출마를 사퇴함으로써 9월20일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아베 정권’의 탄생은 사실상 확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고이즈미 총리 이상으로 보수 우파적 성향을 가진 정치가 아베의 등장이다. 지금 그 정권의 구체적인 방향성을 놓고 보수 우파 사이에 줄다리기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일왕 발언의 특종도 그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미국에서도 나타나듯이 보수 우파에는 크게 세 가지 흐름이 공존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추진하는 경제적 보수파, 전통적 백인 사회의 가치와 우월성을 주장하는 이념적(종교적) 우파, 그리고 군산 복합체를 중심으로 한 군사적 매파가 그것이다. 일본의 ‘우경화’에도 이와 비슷한 세력 구도가 보인다.
재계로서는 국민적 인기를 배경으로 아베 정권이 신자유주의적인 고이즈미 개혁을 계승해 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러나 아베 개인은 이념적 우파, 군사적 우파 성향이 좀더 강하며, 그 주변 인물들은 더욱 그러하다. ‘아베 정권’을 둘러싼 줄다리기가 치열하다.
이종원 일본 릿쿄대 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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