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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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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굴욕과 절망의 긴 터널이었던 게토와 아우슈비츠에서 600만 유대인들은 ‘다름과 차이의 적’들에 맞서 싸우다 이름 없이 사라져갔다. 소리 없이 울려 퍼진 이들의 저항은 적에 대한 보복 투쟁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적 자유를 위한 화해의 신호였다.2006년 7월13일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함께 아우슈비츠의 저항은 화해의 의미를 상실한다. 몸에 구멍이 뚫리고 사지가 떨어져나간 레바논 사람들의 참혹한 신음소리와 함께 인류의 역사는 과거로 끝없이 퇴행하고 있다. 철학자 아도르노의 말처럼 역사는 야만적 자연 상태에서 참으로 인간적인 상태로 나아가기보다 투석기에서 핵폭탄으로 발전하는 것일까. 폭력의 수단은 날로 새로워지지만 자유의 역사는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변화가 있다면 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한 것뿐이다.
모든 폭력은 타자의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하지 않고, 다름을 같음으로 동화하려는 욕구의 표현이다. 타자를 자신과 같게 하려는 폭력은 세 단계로 관철된다. 첫째, 가해자는 직접적 폭력을 통해 피해자를 굴복시킨다. 둘째, 가해자는 피해자를 악의 축으로 규정한다. 타자에게 나를 파멸시킬 수 있는 괴력을 가진 악마의 이미지를 덧씌우고 이를 근거로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한다. 이 과정에서 폭력의 가해자는 자신이 조작한 타자의 이미지가 주는 공포에 사로잡힌 반면, 피해자는 어느덧 가해자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셋째, 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하는 것이다. 타자를 자기와 같게 하려는 가해자의 목적은 이렇게 완결된다. 그렇지만 타자에 대한 가해자의 두려움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폭력은 제거되기보다 오히려 점점 커져만 간다.
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다름이 주는 공포에 맞서 저항하는 것이다. 저항은 타자를 무력화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와 화해하기 위한 것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있지만, 출세한 사람은 새로운 가해자일 뿐이다. 과거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영원히 그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참혹했던 과거에 대한 생생한 기억은 그를 권력에 굶주린 폭력의 노예로 만든다. 억울하면 출세할 것이 아니라 저항해야만 하는 이유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선조들이 전달해준 희망의 씨앗을 싹틔우지 못하고 새로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자신들이 자행한 폭력이 언젠가 자신들에게 되돌아올 것이라는 원초적 공포만이 그들을 지배한다. 한 사람을 죽인 강도가 피해자 가족 모두를 죽인다고 보복의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폭력을 통해 두려움은 극복되지 않고 오히려 강화된다.
미국을 등에 업은 폭력으로 타자(무슬림)를 굴복시키려는 이스라엘의 전략은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폭력을 점점 극단화할 뿐이다. 끝없이 상승하는 그들의 공포와 폭력은 타자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파멸로 이끌 것이다. 정당성을 상실한 노골적 폭력은 중동을 넘어 온세계로 반유대주의를 확산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폭력을 멈추고 자신들을 지배하는 공포를 극복했을 때만 이스라엘은 자기파멸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 역사의 발전을 주장하는 모든 이론은 기만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렇지만 죽음의 공포를 안고 저항하는 사람들의 실천을 통해 그래도 역사는 발전한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 베이루트에서 저항하는 사람들에게도 희망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유를 통해서라도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그들의 저항적 실천과 연대하는 것은 자유를 꿈꾸는 사람들의 몫이고 희망일 것이다.
박구용 전남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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