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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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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유럽 나라들이 지금 서로 전쟁을 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냉전시대에 대립하던 동서 유럽은 대부분 지역이 유럽연합으로 통합돼 가고 있다. 러시아는 유럽연합에는 들어가지 않겠지만 유럽 나라들과의 갈등은 원치 않을 것이다.이렇게 될 수 있었던 데는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의 몫이 크다. 이 회의는 원래 옛소련의 제안으로 출범한 것인데, 애초 취지는 2차대전 후의 각 나라 영토와 주권을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며 공존하자는 것이었다. 1975년 여름 헬싱키에서 열린 이 회의의 결과 동서 양쪽 진영이 이념 차이는 있지만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협력할 바탕이 마련되었다. 이는 결국 전후상태 청산 및 냉전 종식을 이끌어낸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동유럽 나라들이 시민사회 내부의 민주화 요구를 통해 변화하면서도 영토나 안보상의 불안을 염려하지 않았던 것은 이 회의와 같은 지붕이 있었던 덕분이다.
동북아시아 나라들은 목하 전방위로 갈등하는 중이다. 전후상태 극복은커녕 오히려 새로운 전후문제가 날마다 생겨나는 꼴이다. 남북한, 일본·중국, 어느 한 나라도 서로 신뢰할 만한 이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예컨대 야스쿠니 신사 문제는 순수한 과거사 문제라기보다 일본의 군사 대국화에 대한 주변국들의 우려를 반영하는 현재 문제인데, 주지하다시피 일본은 중국의 군비증강과 함께 북한의 군사실험을 강력한 재무장 빌미로 이용한다. 상호불신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앞뒤를 가리기 힘든 면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은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문제로 온나라가 시끄러운데, 군사주권을 되찾는다는 긍정적인 면과는 별개로, 이것이 평화와 인간다운 삶의 보장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자주국방’과 관련하여 막대한 국방비 증액이 예상되는데다, 남북은 지금까지보다 더 직접적인 군사적 대립의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남북 평화가 확립되지 않으면, 국민의 안보불안 때문에 국방의 요구에 다른 모든 목소리가 묻힐 수도 있다. 게다가 어디 북한뿐인가. 일본·중국의 군사주의, 패권주의에서 비롯되는 위협론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역내 빈곤 해결과 환경문제 개선, 삶의 인간화에 쏟아야 할 노력이 군비증강과 증오의 에너지 속에 끌려들어가 버린다면 문제다.
대책은 무엇인가? 남북 신뢰구축은 물론이고 동북아 전체의 상호군축을 통해 이 지역을 평화지역으로 만들어야 한다. 군축은 기능적 면에서도 필요하지만 평화적 심성을 강화시켜준다는 점에서도 인간적인 해법이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대정신은 평화가 되어야 한다.
지금은 기약 없이 표류하고 있지만, 6자 회담은 잘만 기능하면 동북아 평화협력기구의 모태가 될 만한 틀이다. 역내 주요국이 다 참석하기에,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북한을 국제사회로 끌어내 변화시킬 수 있다면 이 성과를 딛고 지역 전체 평화라는 목표 쪽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 한국·러시아·중국 모두를 상대로 영토 갈등을 일으키는 것도 전후 영토 존중이란 대원칙이 동북아 나라들 사이에서는 포괄적으로 확립되지 않은 탓이다. 상호존중, 군축평화, 경제협력, 인권, 이런 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범지역기구가 필요한데, 이제는 ‘안보협력’보다 ‘평화협력’이란 개념이 더 절실하다. 북한 핵실험설이 난무한다. 북한은 압박을 받을수록 더 심한 강경책으로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 같다. 북한의 자폐 고립적 태도가 답답하지만, 현실 세력으로서 북한을 포함하는 다자간 평화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현실적인 제안이냐고? 혼자서는 안 되며, 인내심과 힘을 모아야 하는 일이다.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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