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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9.05 19:59 수정 : 2006.09.05 19:59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

세상읽기

지난주말 신우익을 표방하는 단체인 ‘선진화 국민회의’로부터 전자우편을 받았다.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추진에 반대하는 성명서에 서명해줄 것을 호소하고 있었다. 성명서에는 왜 자주보다 강자와의 동맹이 중요한지에 대한 근거들이 진부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눈길을 끈 것은 여러 원로 철학과 교수들이 회원들의 동의절차도 없이 ‘한국철학회’의 전·현직 회장이라는 점을 앞세워 서명운동을 이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학자가 자신의 이론을 실천과 결합하기 위해 현실에 뛰어드는 것은 나무랄 일이라기보다 추천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전문적 이론 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정치적 수사를 동원해 편을 나누는 싸움을 하는 것은 학자가 할 일은 아니다. 더구나 철학자가!

정치가 찬반이 갈리는 문제를 가지고 적과 동지를 효과적으로 가르는 싸움이라면, 철학은 적과 동지를 나누는 가르기의 기준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학문이다. 이런 차이를 무시하고 실천을 앞세우는 철학은 항상 강자의 권력에 촉수를 대고 있는 긍정의 철학이다. 억압과 배제가 넘쳐나는 부정적 현실을 긍정하는 철학은 강자의 폭력에 신음하는 사람들의 절규조차 들을 수 없게 만든다. 아우슈비츠에 울려 퍼진 바그너의 <지크프리트>처럼.

나치는 뛰어난 유대인 음악 연주자들을 선별한 다음 가스실로 향하는 동족에게 지크프리트를 연주하도록 강요했으며, 집단학살이 있는 밤이면 확성기를 통해 지크프리트를 크게 틀었다고 한다. 죽어간 자들의 마지막 절규조차 아무도 들을 수 없도록 연주한 바그너의 음악은 나치의 총소리에 리듬을 맞춘 반주음악이었다. 이 때부터 지크프리트를 듣는 것은 소름끼치는 저주의 눈빛과 싸우는 일이 되고 말았다.

아우슈비츠가 죄의식 없이 바그너 음악을 향유할 수 없게 만들었다면, 한국 철학계를 지배해 온 긍정의 철학은 한국을 철학 없는 사회로 만들었다. 흔히 한국철학 1세대의 대부로 평가받는 열암 박종홍(1903~76)은 긍정 철학의 창시자다. 열암은 일제 말기에는 총독부 학무과 촉탁을,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에는 박정희가 이끈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위원을 맡는다. 열암의 학식과 성품에 관계없이 그의 철학은 조선통독부와 박정희가 행한 억압과 폭력의 배경음악이었다. 열암의 현실 긍정 철학은 그가 초안을 마련한 ‘국민교육헌장’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승만 정권에서 문교부 장관을 지내면서 폭력 통치의 정당성을 외친 안호상(1902∼99)과 전두환 정권의 문교부 장관으로서 ‘국민윤리’를 통해 안보 이데올로기 교육을 강화한 이규호(1926∼2002)의 철학 역시 어둠속에서 고통받는 자들의 절규를 못 듣게 만든 지크프리트와 다르지 않았다.

긍정의 철학이 폭력의 반주음악이라면, 부정의 철학은 폭력으로 빼앗긴 존재의 언어를 찾아가는 철학이다. 긍정의 철학이 강자의 힘에 기대어 적과 동지를 나눈다면, 부정의 철학은 억압과 배제를 은폐하는 강자의 이데올로기를 폭로한다. 지금 한국사회에 필요한 철학은 인간과 자연의 고통스런 몸짓과 외침을 널리 알리고, 말할 수 없는 모든 존재의 목소리가 되는 부정의 철학이다.

한 개인이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추진에 반대하는 것은 그의 자유다. 그러나 한국철학회의 이름을 걸고 서명운동을 벌이는 것은 권력 의지로 왜곡된 긍정 철학이 아직도 독재자들의 영혼이 숨쉬고 있는 한나라당과 어울릴 화음을 찾고 있는 것이다. 한번도 어둠속을 배회하지 않은 긍정의 철학은 한국에서 철학하기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고통과 멀어진 철학에 젊은이들이 관심을 가질 리 없기 때문이다.

박구용/전남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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