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패밀리사이트

  • 한겨레21
  • 씨네21
  • 이코노미인사이트
회원가입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6.09.26 20:35 수정 : 2006.09.26 20:35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

세상읽기

논술과 토론. 익숙하면서 낯선 두 개념이 유령처럼 한국 사회를 배회하고 있다. 논술과 토론의 이름을 붙인 상품은 성장의 한계에 도달한 교육시장의 구원을 약속한다. 논술과 토론은 한편에서는 최고의 성장산업으로 각광받지만, 한편에서는 교육, 아니 공교육의 파탄을 알리는 상징적 기호처럼 보인다.

학벌이라는 현대판 신분제를 통해 시장과 권력을 독점해 온 서울대가 선별 기준으로 논술을 제시했지만, 공교육은 교육의 주체조차 찾지 못해 허둥대고 있으며, 현재와 미래의 학부모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시장을 기웃거리고 있다. 문제는 논술이 무엇이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누구도 책임있게 대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 논술이고 토론인가?

위계적 권위주의 시대에는 낯선 이름만 있었던 논술과 토론이 교환 불가능한 것, 동일화될 수 없는 것과의 차이와 소통이 강조되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부활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사실 논술과 토론은 가장 오래 된 교육 방법론이다. 토론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생각하는 것이라면, 논술은 비판적이고 통합적인 생각을 기반으로 의견이 다른 사람과 토론하듯 근거를 제시하며 자기주장을 펼치는 논리적 글쓰기다. 따라서 논술과 토론은 전문가를 양성하기에 필요한 것만도 아니고, 학벌사회에서 개인의 신분을 결정하는 선별의 논리도 아니다. 논술과 토론은 좀더 정의롭고 살만한 사회를 꿈꾸는 시민 모두를 위한 교육 방법이어야 한다.

사회의 급속한 변화에 맞춰 논술과 토론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오랫동안 외면해 온 서울대가 왜 갑자기 방향을 바꿨을까? 현실의 변화를 이제야 깨달은 것일까, 아니면 변별력 있는 선별 기준을 새롭게 발견한 것일까? 앞의 경우라면 서울대는 좀더 신중한 태도를 취해야 했다. 먼저 논술과 토론 교육의 의미와 방향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활성화하고, 이 과정에서 교육의 주체와 방법에 대한 합의 과정에 참여해야 했다. 서울대는 이를 위해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채, 마치 훈령을 내리듯 입시안을 발표했다. 서울대의 무책임한 태도는 교육의 성장이 아니라 성장산업에 의한 교육의 식민지화를 부축이고 있다.

교육산업이 교육을 식민지화한 사회에서 논술과 토론은 자신의 교환가치를 높이려는 사람들의 구매욕을 강요하는 상품일 뿐이다. 성적으로 한 학생의 교환가치를 평가하고 쓸모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별하는 나라, 서울대 합격생의 수에 따라 좋은 학교와 나쁜 학교를 가르는 나라에서 교육은 시장의 도구로 전락한다. 학교와 학원을 넘어 모든 사람의 일상적 삶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선별 체계는 산업이지 교육이 아니다.

교육은 한 사람이 자기를 형성하고 실현하고자 낯설고 새로운 것과 만나서 소통하고 배우는 과정인 반면, 교육산업은 유용성의 잣대에 따라 교환가치를 높임으로써 권력과 자본을 선점하려는 경제 체계다. 경제 체계를 조정하는 시장이 악은 아니다. 그러나 시장이 식민화한 교육은 ‘더 빨리’, ‘더 높이’, ‘더 많이’를 내세워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간주하는 교육산업의 도구일 뿐이다.

어떤 사람도 교육 없이는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없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고 가꾸는 교육에는 무관심하다. 삶의 방향을 선택하는 일은 쉽지만 비싼 값에 팔릴 수 있기는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육이 이처럼 철저하게 도구화된 사회에서 어떻게 희망을 되찾을 수 있을까?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토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스스로 비판적이며 더불어 통합적으로 사유하는 학문인 철학이 절실한 시대다.

박구용/전남대 교수·철학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세상읽기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