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10.15 22:46
수정 : 2006.10.15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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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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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노무현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한-일 정상회담은 북한 핵실험 소식에 가려서 별로 주목받지 못한 채 공동 기자회견도, 공동 언론발표문도 없이 끝났다. 한-일의 산적한 현안에도 불구하고 과거사 인식을 둘러싼 긴장과 충돌로 양국 외교관계가 제 구실을 못한 터라 양국 정상회담은 만남 자체로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이번 회담도 과거사 인식에 대해 두 정상 차원에서 공동으로 천명할 만한 공통의 합의를 끌어낼 수 없었다. 한국 정부는 과거사 문제에 대해 ‘사과에 합당한 실천’을 요구하지만, 일본 정부의 태도와 행동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이래 역사 교과서 왜곡, 야스쿠니 신사 참배, 독도 영유권 주장에서 보듯이 그러한 요구를 무색하게 한다.
태평양전쟁 때 미군이 남태평양에서 조선인 노무자들에게 뿌린 전단을 최근 몇 건 보았다. “반도 출신 자제군”으로 시작하는 전단들은 일본의 조선 착취와 일본군의 조선인 노무자들 학대를 직시하고 미군에게 투항할 것을 권유한다. 이 자료는 미군이 조선인 노무자들이 일본군 전투력에서 차지하는 중요성과 그들의 열악한 처지를 인식하고, 일본군과 별도로 조선인 노무자들에 대한 심리전을 중시했음을 보여준다. 미국 국립문서관이 소장한 이 자료의 발굴자는 재미 사학자 방선주 박사다. 그가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 미군이 노획한 일본군 자료에는 ‘반도 봉사단(半島 奉仕團)’이라는 용어가 자주 나온다. 이는 한반도에서 모집해온 노무자라는 뜻으로, 비행장 건설, 도로공사 및 전선으로 물자를 수송하는 짐꾼으로 노역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방 박사는 또 남양군도에서 한국으로의 귀환자 1만1천여명의 승선자 명부를 발굴해서 최근 공개했다. 종전 후 미국 태평양함대가 작성한 것이다. 일본 후생성이 1963년에 발간한 자료에 나온 남양으로부터 한국으로 송환자 수가 7727명이었던 데 비해 이 명부는 훨씬 더 많은 숫자를 포함하고 있고, 귀환자의 성명과 함께 국적, 나이, 직업, 한국의 본적지 주소 등을 기록한 훨씬 상세한 자료다. 자료의 포괄성과 구체성으로 볼 때 일제에 의한 남양군도로의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 해명과 현재 진행 중인 강제동원 피해 진상 규명에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인 노무자, 농업이민, 위안부가 남양에 끌려간 경위는 취업사기, 길거리 납치, 자원 등 다양하겠지만, 그 실태에 대해서는 관련자들의 간헐적 증언이나 피상적인 사후 조사가 있을 뿐 그 전모가 아직 밝혀져 있지 않다. 하지만 자료의 망실과 부재, 망각의 세월을 넘어서 일본의 ‘자유주의 사가’들은 연행의 강제성 자체를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인 학자 와다 하루키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를 비난하기에 앞서 일본의 조선인 강제동원 진상을 규명하고 이를 반성할 것을 일본 사회에 촉구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최근 강화되는 군사 대국화의 물결에 점점 작아지고 있다.
남태평양에 연행된 노무자, 농업이민, 군위안부 등 일본의 조선인 강제동원이 그 실태를 규명해야 할 역사 인식의 과제라면, 일본 정부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둘러싼 한-일 긴장은 현실의 문제이고, 북핵 해결과 동북아시아 평화체제 수립은 미래 전망과 관련된 문제다. 하지만 이 세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과제들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얻는 데 필요한 것은 풍부한 역사 인식과 역사적 상상력이다. 그리고 그것은 엄정한 사실 인식의 토대로부터 발동되는 것이다. 이 시대의 빈약한 역사 인식과 빈핍한 역사적 상상력을 메우기 위해서 재미 원로 사학자 방선주 박사는 오늘도 머나먼 이국 땅에서 묵묵히 문서고를 뒤지고 있다.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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