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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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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인구의 고령화는, 다른 조건이 일정하다면 국가 수준에서 생산성을 저하시킬 뿐 아니라 복지비용 부담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는 빠른 속도로 고령화되고 있고 30~40년 후에는 세계에서 가장 고령화된 국가에 속하게 될 것으로 예측되는데도 이 문제를 극복할 뚜렷한 묘안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지금까지 생산연령 여성인구의 절반만이 경제활동에 참여해 왔기 때문에 추가적인 여력이 있다는 점과 다른 선진국과는 달리 고령인구의 근로의욕이 매우 높다는 점에서 희망적이다.여러 설문조사에서 우리나라 노인들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은퇴하지 않고 싶다고 응답하며, 정부가 노인들을 위해 해주기 바라는 가장 중요한 복지제도로 취업 알선을 꼽는다. 이쯤 되면 우리나라 노인의 근로의욕은 세계 최고 수준임이 틀림없다. 노인들의 근로의욕이 높은 것은 연금제도가 성숙하지 않았고 다른 복지제도도 미비하기 때문에 생계를 스스로 해결해야 할 상황임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좋아라 할 일만은 아니다. 그렇다 해도 지금 형편에서는 노인들이 일하고자 하는 의욕을 보이는 것이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높은 근로의욕은 그저 의욕일 뿐, 현실에서는 50대 초반에 벌써 자신이 하던 일에서 물러나야 하며 재취업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실정이다.
고령자들이 경제활동을 계속하기 어려운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학자들은 연공에 따른 급여 지급, 즉, 일한 기간이 길어지면 임금도 올라가는 임금결정체계 때문에 일정한 연령이 지나면 생산성에 비하여 임금이 높아져서 고령자를 계속 고용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것은 물론 옳은 말이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과제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것뿐일까? 필자가 보기에 문제는 좀더 근본적인 데 있다. 일터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주어진 역할과 하는 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성별이나 나이에 따라 대하는 방식이 크게 달라지는 우리의 문화를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나이대접하는 우리 문화가 노인들의 경제활동 참여에는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는 말이다.
며칠 전 노인의 달을 맞아 서울시가 노인들에게 일자리를 알선하기 위해서 주최한 박람회의 명칭은 ‘어르신 일자리 박람회’였다. 많은 공공기관이 공식적인 용어로 노인이나 고령자 대신 ‘어르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언뜻 보기에도 이것은 호칭의 인플레다. 과거에는 ‘늙은이’라는 호칭에도 무시하거나 비하하는 의미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젊은이’라는 호칭은 지금도 따뜻하고 친근하게 쓰이는 데 비해서, ‘늙은이’라는 호칭은 ‘노인’으로 바뀌었다가 요즘은 다시 ‘어르신’으로 바뀌고 있다. 진심으로 존중하는 마음이 없다 보니 원래 쓰던 호칭은 자꾸 비하하는 뜻으로 쓰이게 되고, 존경심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호칭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어르신’은 느낌이 좋은 우리말이므로 일상생활에서는 사용을 권장할 만한 호칭이다. 그러나 노동자를 새로 채용하려는 사용자에게 ‘어르신’을 채용하라고 권해서는 효과가 있을 것 같지 않다.
일터에서는 각자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하며 서로 인격적으로 존중하면 그뿐이다. 사안이 무엇이냐에 관계없이 상급자나 선배의 의견이 하급자나 후배의 의견보다 존중되는 권위주의적인 조직문화 속에서는 나이든 사람과 젊은 사람이 서로 편하게 일하기 어렵다. 나이든 사람은 자신보다 나이 어린 상사가 등장하는 것을 참기 어렵고, 젊은 사람은 나이든 사람을 밀어내고 싶어진다. 다가오는 고령사회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진정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믿음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장지연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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