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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유명한 소설 제목은 17세기 영국 시인 존 던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이 종은 죽은 사람을 위한 종(弔鍾)이다. 시는 “사람은 누구도 스스로 온전한 섬이 아니다. 모두 대륙의 한 부분이다”로 시작해서 “그러니 묻지 말라, 조종이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지를, 그것은 그대를 위해 울린다”라고 끝난다. 사람은 인류의 일원으로 살고 있고, 모든 사람의 삶은 연결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시다.북한 핵문제로 소란했던 이 몇 주만큼 절실하게 이 시가 생각난 적이 없다. 그리고 소동 속에서, 지난 2월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에 들렀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곳에는 1945년 8월9일 피폭 당시의 참상을 전해 주는 유물과 자료가 전시돼 있다. 피폭 시점인 낮 11시2분을 가리킨 상태에서 멈춰버린 찌그러진 시계, 으스러지거나 절단된 인체가 물체와 함께 녹아 들어붙은 전시물 등이 인류의 비극을 말해준다. 그 중에서도 내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료집 속의 사진 한 장이다. 그것은 히로시마에 원폭을 떨어뜨린 미군 전투기‘에놀라 게이’의 조종사 티베츠 대령이 부리는 비행기 옆에서 웃음을 띠며 찍은 사진이다. ‘에놀라 게이’는 대령의 어머니 이름을 딴 것이다. 그는 아끼는 비행기에 고향 어머니 이름을 따서 붙였고, 조국을 위해 싸운다는 뿌듯한 마음을 웃음에 담았으리라.
하지만 그는 자기가 수행한 임무의 끔찍한 결과를 알고 나서도 웃을 수 있었을까? 피해자들도 주어진 생명을 가꾸며 살던 ‘인간’이란 것을 생각했을까? 적국 국민이니 도륙당해 마땅하다고 여겼을까? 피폭자들의 처참한 모습과 조종사 미소의 대비는 무심코 삼켰는데, 소화되지 않고 뱃속에서 부대끼는 악성 이물질 같은 기억으로 내게 남았다.
핵무기는 자신은 절대선이고 상대방은 절대악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만들고 사용한다. 그러나 핵무기는 선인·악인을 가리지 않는다. 원폭 투하로 일본인 희생자를 빼고도 7만명이 넘는 한국인 사상자가 발생했고, 네덜란드인·오스트레일리아인·중국인도 희생당했다. 나가사키 피폭 중심지에서 50킬로미터 떨어진 포로수용소에는 1000명 넘는 미군포로가 있었다. 그들은 죄다 안전했을까?
착한 핵무기란 없다. 핵실험 자체가 재앙이다. 옛소련 시절, 지하실험을 포함한 핵실험이 행해졌던 노바야 제믈랴섬 일대에서는 많은 기형아가 태어났다. 팔다리가 없고 등이 휘고 눈망울이 슬픈 아이들은 사진으로조차 마주 대하기 고통스러웠다. 실험 결정을 내린 사람들은 안전한 곳에서 웃음지었을까? 강대국들의 핵무기가 작은 나라들의 핵실험을 부추기는 상황에서,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는 절대선 세력과 그 적용 대상이 되는 절대악 세력이 있을 수 없다. 일본의 핵무장도 말이 안 된다. 북한 핵무기를 제거하면서 동시에 세상의 모든 핵무기 제거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 하나, 북한 핵실험 뒤 외교군사 쪽에 몰린 관심 때문에 방사능 유출로 비롯된 환경파괴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핵실험 직후 여고시절의 친구가 보내 온 글이 있다. “체르노빌 사고 후 유럽 각국이 국민들 많이 속였잖아, 방사성 물질 머금은 구름이 유럽으로 거의 오지 않았다고. 나 그때 거기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방사성 물질 많이 먹었던 거지. 이제 며칠 후부터는 함경도에서 날아오는 방사성 물질을 먹게 될지도 모르지. 우린 현재진행형으로 먹고 있는데도 누군가들은 그럴 일 없다고 데이터 보여주며 세미나 열고 말이야!”
종이 누구를 위해 울리는지 묻지 말라. 우리가 어리석음에 휩싸여 있는 한 ‘조종’은 우리 모두를 위해 울릴 것이다.
한정숙/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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