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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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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스탈린 시대 강제 수용소를 소재로 한 솔제니친의 일련의 작품들은 정치적 이유로 주민들을 집단통제하고 기본권을 박탈하는 체제에 대한 고발로서, 스탈린주의에 대한 소련 바깥의 이미지를 굳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소설들이 발표된 1960~70년대에는 수용소 군도가 이미 없었지만, 작품들은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비판론을 확산시키는 데 큰 구실을 했다. 솔제니친은 직접 수용소 생활을 겪은 인물로, 그의 정치적 성향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그가 그린 수용소 군도의 참상마저 무시하지는 않았다.강제 집단수용소는 주로 근대국가 형성 이후에 세워지고 운영되었고, 특히 20세기의 국가폭력을 상징한다. 수용소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주민들은 공포 속에서 꼼짝없이 복종했으므로 이는 가장 철저한 통제의 장치였다. 근대국가 운영의 한 수단으로서 약자와 부분적 일탈자의 획일적 배제 및 통제라는 문제와 관련해 집단수용소에서의 인권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강제수용소의 일종인 관타나모와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의 인권침해도 국제적 분노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한국 정부가 유엔의 북한 인권 결의안에 찬성 투표했다고 한다. 결의안 발의자들은 사회경제적 인권뿐 아니라 정치적 인권, 특히 정치범 수용소 문제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찬성투표를 두고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주로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인 듯하다.
그런데 남북대화와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설득을 양자택일의 문제로만 생각할 것은 아니다. 양자를 병행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상호신뢰가 필요하다. 얼마 전까지 북한 인권 논의에 모두가 흔쾌히 동참하지는 않았던 것은 미국 네오콘들이 인권보호란 명분으로 자국 이익을 위한 전쟁을 벌여 이라크인들의 인권을 완전히 말살해 버리는 과정을 눈앞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오콘과는 별개로, 국제 앰네스티를 비롯한 민간 인권기구들도 오래 전부터 북한 인권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다.
사실 북한 인권 결의안은 유엔에서 여러 번 통과되었는데, 실제 효과는 거의 없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 같은 반인도적 행위에는 반대를 못하면서 북한 인권 결의는 계속 채택하는 데서 유엔의 한계를 보는 사람도 많다. 유엔은 특정 사회를 ‘왕따’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제재 위주의 결의를 하기보다 인권상황이 개선되면 인도적 원조와 개발원조 자금을 더 주는 식으로, 긍정적 유인책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북한도 유엔의 인권결의가 북한 압살 기도요, 도발이라고만 주장하지 말고, 이를 국제사회에 비친 북한의 이미지로, 주민들의 삶의 개선을 위한 권고로 받아들일 일이다. 북은 핵실험 뒤 고립에 빠져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립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상황도 조금씩 마련되고 있다. 인권 개선은 다른 누구를 위한 게 아니라 북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동참하는 데 필요하다.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도 자기성찰의 능력을 가져야 한다.
한국에도 과거에 삼청교육대 같은 유사 강제수용소가 있었다. 이는 이를 만든 정권에 도움은커녕 부담만 되었다. 이러한 남쪽 사회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는 것도 방법이다. 북한 인권문제에 관한 접근방법은 “함께 인간답게 삽시다”라는 초대여야 한다. 모든 일이 한꺼번에 풀릴 수야 없지만, 진실로 개선을 이루려는 생각을 하고만 있다면 북한이 국제사회로 나오리라 기대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이런 경험을 전달하고 인권향상을 위한 설득을 할 수 있는 기회일 것이다.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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