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구용/전남대 교수·철학
|
세상읽기
김수영은 머리나 심장이 아니라 온몸으로 시를 썼다. 시로 변한 몸, 몸이 된 시의 그림자조차 의식하지 않았다. 시인의 몸은 가련한 안락을 거부하고 혼돈 속에서 세계(사람)와 만나 세계의 언어가 되고 시가 된다. 그의 몸을 타고 세계는 시로 다시 태어나지만, 그 자신은 끝없는 자기부정 속에서 무의미가 된다. 그의 시에는 아무도 말하지 못한 세계가 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없다. 그렇게 그의 몸은 허가받지 못한 전위가 되고 불온한 시가 된다.1968년 한국의 문단은 김수영과 이어령의 ‘불온시’ 논쟁으로 새해를 연다. 그 당시 언어를 빼앗긴 사람들(세계)의 시, 그들의 몸이 된 김수영의 시는 서랍 속에 감추어질 수밖에 없는 불온한 것이었다. 이를 두고 이어령은 허가되지 않은 불온한 시를 써서 서랍 속에 감춰둔 시인은 독재가 쓰러진 후에야 독재자의 빈 의자에 돌을 던지는 동물원의 사냥꾼과 같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김수영은 불온한 시가 아니라 금지된 시를 썼을 뿐이다. 이성의 도끼를 들고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한 시가 아니라, 스스로를 부정하는 데까지 밀고 나간 몸의 시를 쓴 것이다.
흔히 ‘불온시’ 논쟁을 참여예술과 순수예술의 대결로 규정하지만 옳은 생각이 아니다. 가시 없는 장미에 찔린 이어령은 그때나 지금이나 속류 순수파지만, 김수영은 그 당시 벌써 참여파에 피로를 느끼고 작별했다. <달밤>에 <싸리꽃 핀 벌판>에서 서른아홉 김수영을 엄습한 피로는 새로운 부정 예술의 탄생을 위한 아픔이고 치료약이었다. “달 밝은 밤을/ (…)서른아홉 살의 중턱에 서서/ 서슴지 않고 꿈을 버린다/ 피로를 알게 되는 것은 과연 슬픈 일이다”(<달밤>)
‘불온시’ 논쟁으로 한국의 문단이 들끓던 해에 태어나, 87년 6월 항쟁을 이끌던 세대가 어느덧 서른아홉의 끝자락에 와 있다. 불온한 세상의 전복을 꿈꾸던 이들이 세상의 불온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교육자, 정치인, 의사, 판사, 예술인, 그리고 또 부모가 된 이들은 서른아홉 달밤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상으로 현실을 부정하던 참여에 피로를 느끼고 있을까? 아니면 벌써 현실로 이상을 조롱하는 속물이 되었을까? 큰 일에는 무관심하고 작은 일에만 분노하는 속물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속물이다. 그러나 밤에는 음탕한 배설을 즐기고 낮이 되면 점잔을 빼는 순수파 속물들은 위험하지 않은 재미를 찾아 몰려든다. 더 큰 차와 집, 더 높은 성공을 향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속물들은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 관심을 쏟는다. 무엇보다 자식들을 향해 외친다. ‘너는 나처럼 살지 마라!’
자식 사랑을 가장한 이 말에는 아이들을 이유 없는 열등의식의 노예로 만들려는 권력에의 의지가 숨어 있다. ‘나처럼 살지 말라’는 말에서 ‘나’는 비루한 현실의 ‘나’일 뿐, 속물인 내가 꿈꾸어온 ‘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처럼 살지 말라는 말은 나보다 더 큰 성공을 위해 일류 대학에 가라는 준엄한 명령인 것이다. 이 명령이 지배가 아닌 사랑이라면, 자식이 살았으면 하는 모습으로 내 삶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먼저다. 그러려면 남의 자식을 보듯 내 자식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조금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자유를 위해 피로를 느끼자. 서른 잔치가 끝나갈 무렵 피로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도끼를 손에 쥐고 사랑을 외치는 순수파 속물이 되기 쉽다. 이들에게 얼마 전 이어령이 <도끼 한 자루>라는 시를 선물했다. 꼭 달밤에 읽어보라. 그리고 우리와 우리 아이들의 생각과 이념을 찍어 내는 이어령의 도끼가 좋거든 당신의 발등부터 찍어라.
박구용/전남대 교수·철학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