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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희/건국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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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프란츠 파농은 식민지의 농민이야말로 가진 것이 없기에 비타협적인 저항에 나설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농민은 가진 것이라고는 자신의 육신이자 삶 그 자체인 저 땅뙈기뿐이기에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저항하기도 한다.평택 대추리의 김지태 이장은 그래서 지금 안양교도소에 갇혀 있다. 농사꾼의 생활터전을 빼앗아 미군 기지를 확장하려는 정부에 항거하였다는 죄로 나락이 누렇게 영근 자신의 논밭으로부터 쫓겨난 것이다. 내 땅에서 농사짓기를 고집하고 우리 마을에서 같이 살아갈 것을 외쳤던 것이 반항이 되고 폭력이 되고 범죄가 되어버린 셈이다.
징역 2년을 선고한 평택지원은 평화적 생존권을 주장하는 그를 “공권력 경시풍조를 만연시키고 폭력적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잘못된 사고방식을 크게 확산시켰다”고 몰아세운다. 게다가 서울행정법원 제13부는, 주민의 의견 수렴은 커녕 법으로 정해진 평택시장과의 협의 절차도 무시한 채 있지도 않은 군사시설을 핑계로 이들의 생활터전을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철조망을 쌓아 농로를 폐쇄하고 주민의 출입을 통제한 국방부의 행위를 적법하다고 선고하였다.
결국 대추리는 점령당했다. 토지수용과 보상이라는 법적 형식을 갖추었다 해도 그것은 군사적 점령에 다름 아니다. 폭력을 휘두른 자가 그에 방어하는 자에게 되레 폭력을 행사한다고 비난하면서 법의 이름으로 자신의 그 ‘폭력적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 권력은 점령군의 식민화 전략 속에서만 구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현 정부는 소수자 정권의 한계를 다수자 권력을 모방함으로써 처리해 내고자 한다. 자신의 정책모델을 구축하는 데 실패한 이들은 이제 거대 권력이 구축해 놓은 가치관에 기대어 자신의 행위를 규정할 뿐이다. 여기서 미국의 세계전략은 국내적 효력을 확보한다.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은 이들의 안보전략으로 재생산되며, 미국의 통상 ‘자유화’ 전략은 이들의 성장전략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파농에 의하면, 식민모국은 독립을 갈구하는 원주민들에게 “소원대로 독립하고 굶어죽어라”고 협박한다. 마찬가지로 이들은 미국이 떠난 뒤의 안보·성장위기론을 들먹이며 저항은 폭력이고 반항은 반질서일 뿐이라는 또다른 협박을 가공해낸다.
이에 자기 땅에서 강제추방된 자는 대추리 주민들만이 아니게 된다. 정작 유배당한 사람은 이들의 저항에 눈감을 것을 강요당하는 자, 권력의 협박 아래서 스스로의 가치관과 윤리의식을 상실당한 자, 우리 모두이다. 우리의 안보는 미국의 패권주의 전략에 포섭당하고, 우리의 경제는 미국의 통상전략에 점령당하고, 우리의 생활은 재벌기업의 이윤논리에 포획당한 이 현실에서, 그나마 자기주장을 위한 정치공간마저도 폭력시위라는 낙인 하나로 포기할 것이 강요되는 우리 모두가 또다른 대추리 주민이 되는 것이다.
지난달 30일 국제앰네스티는 김지태 이장을 양심수로 지정하였다. 그는 강제추방에 저항하여 평화적 시위의 권리를 행사한 것이며 따라서 정부는 그를 구금할 권한이 없다고 본 것이다. 양심수라는 규정은 단순한 개인적 권리의 구제라는 수준을 넘어선다. 그를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우리 모두의 대표자로 자리매김하는 의미 또한 가지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선언은 이미 점령군이 되어 버린 정부에 대한 항의이자, 동시에 우리 모두를 향해 윤리적 각성을 촉구하는 격률이 된다. 자기 땅에서 버림받지 않으려는 한 농민의 처절한 외침이 우리 모두의 양심으로 공명되도록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동이 있을 때 비로소 그와 우리는 이 대지에 맴도는 저주를 풀어헤칠 수 있을 것이다.
한상희/건국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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