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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숙/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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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칠레의 옛 독재자 피노체트가 죽었다. 그는 합법 선거로 수립된 아옌데 대통령 정부를 1973년 군부 쿠데타로 뒤엎고 정권을 잡은 후 17년 동안 온갖 학살과 고문, 참혹한 비인도적 만행과 불법행위를 저질렀지만 이에 대해 한 번도 책임지지 않았다. 국제 사회의 거듭되는 요구에도 그는 끝내 법정에 서지 않은 채, 나이 아흔이 넘을 때까지 구차하게 살다 갔다. 죽은 독재자의 영혼을 위해 안타까운 것은 그가 피해자들에게 “미안하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스스로 인간적으로 정화될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는 점이다.민주화된 칠레 사회의 많은 시민들이 피노체트의 죽음 앞에서 그의 집권기를 비판적으로 돌아본 반면, 그의 지지자들은 공개적으로 애도 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공개시위는 피노체트가 저지른 범죄행위의 전모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사회적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가능했다.
통일된 독일 사회가 과거 동독의 국가안전부(슈타지)가 저지른 인권침해와 관련된 문서들을 공개한 것은 이와 대조된다. 슈타지가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깊이 침투한 흔적은 산더미 문서로 남았다. 국가의 협박과 회유에 의해 일반 시민이 이웃시민을 감시하고 문서로 기록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독일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고 문서 처리를 두고 사회 전체가 논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치열한 논의 끝에 독일 사회가 내린 결론은 아무 것도 은폐하지 않고 모든 진상을 드러내며 문서는 원하는 사람 누구나 열람케 한다는 것이었다. 이 문서공개는 서독이 동독을 흡수통일한 데 따른 ‘승자의 심판’이라는, 그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동독인들 스스로가 문서공개를 원했다는 점에서 승자심판론은 희석되었다. 통일 독일이 나치시대 뿐 아니라 동독시대의 과거사도 정직하게 대면하기로 한 것은 한 사회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사실 한 사회가 과거의 국가폭력을 공개적으로 논의하고 극복할 자세를 보이는가, 이를 뒤로 미루는가, 혹은 영구히 은폐하는가는 그 사회의 전체 역량에 달린 문제이다.
한국에도 과거에 국가 기구가 불법적으로 생산한 엄청난 양의 문서들이 쌓여 있다. 불법 감시, 체포, 구금, 고문의 근거가 어떻게 편의적으로 마련됐고 진행경과와 결과는 어떠했는지 기록한 문서들이다. 예를 들어 과거 신군부 시절에 보안사가 작성한 불법 기록문서들이 보안사를 혁신하여 수립된 기구인 기무사에 보관되어 있다. 특히 큰 문제는 불법 감시 및 조사의 결과로 작성된 수많은 개인 정보 문서이다.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엑스(X)-파일들이다. 현재의 문서담당자들은 언제 어떤 문서가 만들어져 보관되고 있는지 모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과는 상관도 없이 오래 전에 생산된 불법문서들을 계속 끌어안고 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불법적으로 생산된 문서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정식 정부 문서들을 보관하는 기구인 국가기록원에 넘길 것인가, 국가폭력을 연구하는 별개의 연구기관을 만들어 보관하고 연구자들에게만 공개할 것인가, 시민들에게 공개할 것인가, 아니면 몇 가지 대표적 사례만 열람한 후 폐기할 것인가, 문서를 공개한다면 개인 사생활에 관한 정보는 어느 수준까지 보호하고 비공개로 해야 할 것인가 등등, 여러 논의사항과 제안이 있을 수 있고, 이에 대해 사회전체가 관심을 가지고 공론의 장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를 위한 진지한 논의는 제쳐두고 과거사 규명을 위한 노력 자체를 문제 삼고 이를 막으려는 목소리들이 들린다. 한 사회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은 국가권력이 저지른 부당한 억압과 불법행위 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했던 사람들에게 뒤늦게나마 국가의 이름으로 ‘미안하다’고 말하기 위해, 그리고 이를 용인해 왔던 사회 전체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전제조건이다. 이 때문에 손해 보는 사람이 있는가?
예를 들어 1980년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던 사람들은 대부분 현행법상 죄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단지 ‘전과’가 있거나, 주변 사람들과 원만하지 못한 관계에 있다는 이유로, 혹은 허름한 옷차림으로 술을 마시고 밤늦게 귀가하다가 단속반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만난 76세 노인의 아드님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스무 살 청년으로 막노동을 하던 그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서 구타당한 후 정신분열증에 걸려 쉰 살이 가까운 지금까지 결혼도 못한 채 노부모에게 얹혀살고 있다.) 강제로 수용되었다가 적어도 50여명이 사망하였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으며, 심각한 정신적 장애를 겪는 피해자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이들 중 상당수는 ‘무슨 잘못이 있어서 끌려갔을 것’이라는 주위의 부정적 시선 때문에 자기가 피해자였다고 신고하지도 못한다. 그들의 전체명단도 밝혀지지 않았다. 4만 명 가까운 인원이 강제 수용되었음에도 자신을 피해자로 드러낸 사람은 4천 명에 불과하다. 따라서 엄청난 사망피해자들이 있었기에 생존자가 몇 천 명밖에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누구도 설득력 있는 반론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책임 있는 지위의 인물이 (대통령이든 국무총리이든 국방장관이든) 그 같은 국가폭력 행위는 불법이었고 강제 수용된 사람들은 무죄였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한다면 피해자들의 삶에 오점처럼 자리한 공백이 사라지고, 여전히 남아 있는 의혹도 풀릴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과거에 편의상의 이유로 행해진 집단적 인권유린에 대한 성찰의 계기도 마련된다. 자기 사회가 저지른 과오를 돌이켜볼 때 사회의 수준은 한층 높아질 수 있다. 과거를 직시한다는 것은 현재의 문제이고 미래의 문제이다.
한정숙/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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