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12.17 17:50
수정 : 2006.12.17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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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욱/서울대 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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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지난 십 년 동안 국회에서 예산안이 법정처리 시한인 12월2일 이전에 통과된 것은 몇 번이나 될까? 놀라지 마시라. 1997년과 2002년 단 두 해뿐이다. 이 두 해는 모두 대통령 선거가 있던 해이고,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찍 처리해야만 했다. 올해도 한나라당이 사립학교법 재개정을 예산안을 비롯한 다른 법들과 연계시켜 의사일정을 전면 거부하는 탓에 15일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될 예정이던 2007년도 예산안 처리가 무산되었다. 잘 알다시피 지난해도 바로 이 사학법 문제로 예산안 처리가 법정시한을 넘겼다. 무슨 문제가 있기에 국정 운영에 일정한 책임을 나누어져야 할 공당이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까지 국회가 예산안을 의결하도록 명시한 헌법 조항을 어겨가며 산적한 각종 민생법안들의 처리를 미루게 하는 것일까?
사립학교는 학교법인이 설치하고 운영하는 학교로,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공익성을 지닌다. 이와 같이 학교는 공공재의 성격을 가지지만 한국 사회의 독특한 교육환경에서 사학 곧 사유재산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그리고 정부의 엄정한 관리 결여로 사학의 재정비리, 인사비리가 빈발했고, 사학이 하나의 치부 수단으로 바뀌기 시작하면서 우리 사회에 비리사학, 부패사학, 족벌사학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2005년 개정된 사학법은 대학평의원회 설치 의무화, 개방 이사제 도입, 법인이사회 회의록의 의무적 공개 등 사학의 공공성, 투명성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었다.
현재 사학법 재개정을 둘러싼 쟁점은 개방형 이사의 추천 및 임시이사의 파견 주체를 둘러싼 견해 차이다. 여당은 개방형 이사제의 현행 유지를 고수하는 반면, 한나라당은 이사의 추천 주체를 동창회, 학부모회, 종단으로 확대하고 임시이사의 파견 주체를 교육부에서 법원으로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당은 한나라당 주장이 사학재단의 코드에 맞는 인사를 개방형 이사로 하자는 것으로 사학법 개정의 근본 취지를 훼손하는 것이라며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태도다. 한 의원의 조사한 결과, 법이 시행된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전국 사립대학 196곳 가운데 전체의 6.6%인 13곳만 개정 사립학교법에 따라 정관을 개정했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학법인들이 사실상 사학법 집단 불복종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도 주무 관청인 교육부는 손을 놓고 있는 셈이다. 한나라당이 국회의 모든 의사일정을 뒤로하고 사학법 재개정에 목을 거는 것은 보수적인 사학재단과 사학재단의 다수를 점하는 보수교단을 지나치게 의식하기 때문이고, 또 당내 계파들 사이의 역학관계로 계속 강경한 쪽으로 당을 몰아가고 있다는 분석이다.
내가 옳다, 네가 그르다 목청 돋우지 말고 그냥 주위를 한번 천천히 둘러보자. 정식 발효되었지만 여전히 작동하지 않는 법률과 법안 집행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 관료들, 이미 1년 전에 통과된 법안의 재개정을 빌미로 의회주의 원칙을 스스로 저버리며 연 이태나 예산안 처리 법정시한을 어기는 거대야당의 볼모가 된 국회, 법 재개정 문제가 대선 득표율 계산과 당권 경쟁의 계기로 이용되는 정당정치, 이것이 우울한 얘기지만 구호로서는 존재하나 현실에서는 작동하지 않는 한국사회 민주주의의 현주소다. 국민들은 피폐해진 민생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피폐해진 민생을 바로잡거나 일으켜 세울 아무런 보장과 대안, 그리고 희망을 줄 수 없다는 데 더 절망하고 있을 것이다.
정용욱/서울대 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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