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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2.19 17:50 수정 : 2006.12.19 17:50

박구용 전남대 교수·철학

세상읽기

역사가 현재와 과거의 끝없는 대화라지만, 잘못된 대화는 미래를 병들게 한다. 진정한 대화는 대등한 인격들의 만남을 전제한다. 서로를 이름을 부르고 응답할 때 만남은 소통이고 연대다. 그러나 나는 호명하는 주체고 너는 응답하는 객체일 뿐인 역사적 만남은 은폐와 과장으로 얼룩진 정치적 수사이고 명령이다.

최근 곳곳에서 역사적 인물들이 호명을 받고 있다. 방송 드라마는 역사적 영웅들을 변장과 과장을 통해 부활시킨다.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을 앞세워 중국과 한판 대결을 벌일 기세다. 뉴라이트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과 친일파를 근대화의 기수로, 쿠데타의 주역을 혁명 전사로 왜곡하고 은폐한다. 과장과 은폐 뒤에 숨은 정치적 목적이 역사적 인물들을 도구화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역사적 대화는 죽은 자의 부름에 산 자가 응답할 때 이루어진다. 억울하게 고통받고 비참하게 구천을 헤매다 이승으로 되돌아오는 귀신 이야기가 아니다. 굿판에 전위예술가로 초대된 귀신은 산 자를 위로하기 위한 정신치료사일 뿐이다. 부름의 정치는 역사에서 승자의 무기를 만들 수는 있지만, 평화로운 미래의 고향을 찾지는 못한다. 미래의 고향은 타자에 의해 굴욕적으로 지배당한 역사나 무력으로 타자를 지배한 역사가 아니라, 우리와 우리의 타자가 서로를 주체로 인정하고 연대한 역사일 것이다. 그러나 저항 없는 약자에게 인정과 평화도 없다.

이성계가 자랑하듯 말한 것처럼 우리는 삼국통일 이후 오랫동안 중화사상에 입각한 사대(事大)에 충실했다. 조공이 구체적 증거다. 세종대왕조차도 조선 백성은 명나라 황제의 신하이기에 조공을 바쳐 진심으로 사대하자고 말한다. 조공이 국제무역의 성격을 갖는다거나 안보를 위한 약소국의 전략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기생권력의 주체성 상실이다. 위정자들은 권력의 정당성을 백성이 아닌 중국의 승인에서 찾았다. 그들에게 백성은 권력의 주체가 아니라 지배의 대상이었다. 큰 고기에 작은 고기를 바친 대가로 권력을 얻은 중간 고기는 작은 고기를 더 악랄하게 수탈한다.

강자에 대한 굴복과 기생이 자연의 법칙이라면 주체성을 찾기 위한 저항은 자유의 원칙이다. 우리 역사에서 권력자들은 오랫동안 자연 법칙의 노예였다. 자유를 향한 저항의 주체는 언제나 농민·민중·시민이었다. 이들의 저항은 ‘우리 안과 밖의 타자’를 무력화하고 지배하려는 전략이 아니라, 타자와 더불어 소통하고 연대하기 위한 과정이다. 이들이 싸운 것은 타자가 아니라, 타자의 억압적 지배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진정한 의미의 저항은 동학 농민전쟁에서 시작된다. 귀천 없는 만민평등을 외쳤던 농민군은 ‘우리 안의 타자’(관군)뿐만 아니라 ‘우리 밖의 타자’(일본군)와도 싸워야 했다. 이 나라의 권력은 백성의 뜻을 존중하기보다 중국이나 일본에 기생하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민족공동체의 주체성 없이 개인의 자율성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오직 농민군뿐이었다. 민중이 곧 민족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겨울바람의 고목처럼 처절하게 싸우다 조국의 산과 들에 피 흘리며 쓰러졌다.

농민군은 죽지 않았다. 그들은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그리고 민중항쟁의 장소에서 불꽃처럼 살아나 우리를 부르곤 했다. 그들의 부름이 없었다면, 그들과의 연대의식이 없었다면 1980년 5월 광주시민들은 또 어떻게 자유와 평등을 위해 죽음의 공포와 맞서 싸울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일까? 5·18의 역사가 정의와 평화를 향한 우리의 의지를 민중의 삶 곳곳에서 호명하는 듯하다.

박구용 전남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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