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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숙/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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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제야에서 원단으로 넘어가는 밤을 꼬박 새웠다. 새벽이 가까워지자 그냥 잠들기가 아까워 산책이라도 하려고 집밖으로 나섰다. 해돋이를 보리라 처음부터 작정한 것은 아니었다. 건물이 빼곡한 서울의 아파트 동네에서 그것이 가능하리라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저 새로 뜬 해를 보고 나서 무얼 해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발길 닿는 대로 걸음을 옮기다 처음 가는 오르막길을 따라 걸었는데, 올라보니 야산이었다. 그곳에선 이미 여러 사람이 해돋이를 기다리고 있었다.우리말에는 시간 단위인 해와, 그 주기의 중심 천체인 해를 가리키는 말이 같다. 서양 언어에서는 아직 그런 경우를 확인하지 못했고, 중국 한자에서도 그렇지 않다. 한자에서는 하늘의 해(日)를 가리키는 말과 같은 시간 단위는 날 일(日)이어서 해와 하루가 일치한다. 그런데 한국어에서는 하늘의 해와 일년이 일치한다. 그래서 새해가 되면 태양도 새롭다. 아마 이런 언어적 일치 때문에 한국 사람들에게는 새해가 될 때마다 새로운 해가 뜨는 것을 보려는 열망이 더 강렬한 지도 모른다.
억겁을 살았을 태양이 새 해가 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시간의 흐름을 잘라, 낡음을 돌이키면서 새로 시작되는 주기 속에 태양을 놓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에게도 공간감각은 있겠지만 시간 차이를 생각하는 동물이 인간 외에도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시간의 구분이 인간에게 행복과 기쁨을 가져다 주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이 인간의 숙명이고, 매번 새로운 해를 만들어 낡은 해와 구분하면서 인간은 역사를 이루어간다.
하늘이 구름으로 뒤덮여 있어 악조건이었지만 해돋이는 그 나름 인상적이었다. 차가운 새벽바람 속에 키 큰 활엽수의 잔가지와 마른 잎들이 안개처럼 몽롱하게 시야를 가리는 야산에서도, 사람들은 일출시간이 될 때까지 여기저기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유원지에서처럼 쿵작쿵작 음악을 틀어놓고 앞뒤로 바삐 오가며 춤을 추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전혀 엄숙하지 않은, 새벽 도매시장의 떠들썩한 분위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들이 내뿜는 열망이 대기에 가득했다. 그 덕분인가, 동쪽 하늘 밝은 데가 넓어지고 뚜렷해지다가 나뭇가지 틈으로 보이는 하늘 한 지점에서 붉은 기운이 갑자기 선명해졌다. 오가던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서서 그곳을 바라보았다. 해와 구름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구름 틈을 비집고 3분의 1쯤 모습을 드러낸 해가 강렬한 선홍색 불길로도 좀처럼 구름을 이기지 못하자 안타까워하는 소리가 이어졌고, 소망을 비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해는 끝내 온전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사람들은 ‘해가 저기 있는 걸 아니까, 본 거나 마찬가지지 뭐’ 라고 말했다. 그리고 누구에게라 할 것 없이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며 돌아서 갔다. 누가 뭐라지 않아도 대한민국 서민들은 스스로 희망을 챙기고 삶의 기운을 추스르는 법을 아는 것 같았다.
해가 다시 구름 속에 완전히 파묻히는 것을 보고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오늘이 아니면 어떠랴, 구름 뒤에 있어도 해는 얼지 않는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집으로 왔다. 대구에 사는 친지에게 전화를 했다. 그곳은 하늘이 활짝 갰고 날씨가 맑다고 했다. 그랬다. 구름과 고투하는 해를 응원한 사람도 있지만 다른 누군가는 화창한 하늘 저편에서 장엄하게 떠오르는 해에 환호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해를 가진다. 그리고 새해가 되면 억겁을 살았을 해를 새로운 해로 만들고 누가 거들 필요 없이 자기도 스스로 새로워질 줄 안다. 그렇게 모인 기운으로 시간도 새로운 흐름을 탄다. 그것이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한정숙/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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