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1.09 17:20
수정 : 2007.01.09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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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구용/전남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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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폭력은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 그리고 망각하는 사람이 있을 때 반복적으로 재생산된다. 계산에 능숙한 사람은 폭력을 방관하고 망각하는 대가로 이익을 챙기지만, 생각하는 사람은 폭력에 저항해 고통받으며 자유 정신을 창조한다.
자유인은 누구나 야스쿠니 참배가 아시아 전체를 공포로 몰아간 폭력에 대한 망각의 정치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야스쿠니는 권력을 위한 전쟁을 국가를 위한 성전으로, 잔인한 폭력을 숭고한 희생으로, 강요당한 죽음을 영원한 생명으로 승화시키는 꿈을 꾼다. 썩은 냄새가 야릇한 향기로 승화하는 순간 아시아 전체는 폭력의 휴화산이 된다. 단지 한국 사람이이어서 야스쿠니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 폭력을 경멸하고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야스쿠니 꿈에 치를 떤다.
사람들은 ‘우리 밖의 타자’가 ‘우리’에게 가한 폭력은 쉽게 잊지 않는다. 국가 공동체가 ‘우리’ 의식을 동원해 기억하도록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패권을 누려 온 세력이 휘두른 폭력은 쉽게 잊는다. 권력을 향한 의지가 망각의 정치를 펴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정신을 형성하지 못한 사람은 망각 정치의 노예가 되고 폭력의 동조자가 된다.
쿠데타로 권력을 쥔 전두환은 불의에 저항하는 광주시민에게 공수부대를 동원해 무차별 폭력을 휘둘렀다. 독재자의 폭력은 ‘화려한 휴가’라는 이름의 군사작전을 통해 행사된다. 폭력에 맞서 죽음의 행진을 감행한 광주시민은 단순히 저항만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저항을 넘어 서로가 함께하는 정의로운 연대와 자유의 정신을 형성하고 창조했다. 그러니 자유와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은 광주를 기억한다.
<야스쿠니 문제>라는 책으로 만난 참된 철학자 다카하시 데쓰야는, 일본은 고통스런 저항을 통해 정신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획득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메이지유신 때는 ‘천황’이 하사한 것이고, 현재 헌법에 보장된 자유는 패전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다. 야스쿠니에 얽매인 일본인의 자유의식은 그 때문에 허약하며, 그들의 민주주의는 항구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우리 안팎의 강자’가 하사한 자유는 ‘망각의 정치’에 의해 폭력으로 쉽게 전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본 민주주의의 한계다. 한국의 자유의식이 일본보다 건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에는 폭력에 저항하며 스스로 정신의 자유를 형성한 동학농민전쟁, 3월 독립운동, 4월 시민항쟁, 5월 민중혁명, 6월 시민혁명이 있었다. 시련을 겪으며 형성한 자유의 역사는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시민 모두의 자부심이다.
망각의 정치와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줄곧 자유의 역사를 위협한다. 독재자의 영혼이 숨쉬는 정당에 들어가 항쟁의 역사를 팔아먹는 정치꾼들, 그들과의 연정 제안을 구국의 결단이라고 외치는 권력자, 전두환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세배를 하는 대통령 후보들이 바로 망각의 정치로 자유를 위협하는 자들이라면, 경남 합천군에 있는 한 공원 이름을 전두환의 아호를 딴 ‘일해공원’으로 변경하는 데 찬성하는 사람들은 망각의 정치에 현혹된 폭력의 동조자들이다. 이들은 사적 이익을 위해 폭력과 자유를 뒤섞는다.
망각의 정치가 거짓 화해를 명목으로 자유와 폭력의 차이를 은폐한다면, 자유 시민들의 정의로운 연대는 자유와 폭력이 결코 하나일 수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봄이 오면 독재자의 폭력을 방관했거나 망각한 자들이 ‘일해공원’으로 화려한 휴가를 떠날 것이다. 이들에게 망각의 정치가 내릴 작전명은 ‘야스쿠니의 꿈’이거나 ‘한나라당 귀몽(歸夢)’일 것이다. 같은 꿈이지만 다르다고 우기면서!
박구용/전남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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