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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범섭/인서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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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실패를 거듭하느니 차라리 정권을 내주라’는 비판에 노무현 대통령이 “진보도 유연하게 변해야 한다”라고 답하면서, 간헐적이던 진보논쟁이 진보진영 전반으로 번졌다.뽑은 말로, 몇 사람의 주장을 들어보자. “민주개혁엔 무능했고 신자유주의엔 유능했다”, “낡은 기득권이 양극화를 더 벌렸다”, “진보를 바라보는 시선에 주목하자”는 비판이 나왔고, 이에 “박정희식 우익민중주의를 고민하자”, “왜 강건너 적엔 너그럽고 가까운 이웃엔 날을 세우는가” 하는 비판의 내심을 다그치는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이 논쟁이 말해주듯 한반도 분단구조는 참여정부의 숙명적인 생존공간이며, 거기서 민주주의적 가치를 지키고 발전시켜 나갈 것 또한 숙명적인 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비판의 대상이자 현장은 지금 한창인 지구촌 새마을운동, 곧 전세계적 신자유주의 흐름이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민주정치와 무관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 거대한 구조의 어느 한 부분만을 보고 지금 한창 경제제국주의를 건설해 나가고 있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자칫 다른 곳에서 상반된 현상이나 결과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지금 겉으로 나타나고 있는 참여정부의 경제적 성과를 실패라고 규정하거나 이를 민주개혁의 실패로까지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아직은 이를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다.
‘참여’라는 머릿돌이 말하듯 참여정부는 87년 민주항쟁의 성과와 과제를 짊어지고 가야 하는 명백하게 정치적인 정부다. 따라서 참여정부의 또하나의 과제인 ‘민주적 경제발전’을 비판의 중심에 올려놓고 비판하면서 그것을 정치로까지 끌어올려 실패로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칫 커다란 대가를 치르고 이룩한 민주주의라는 가치까지를 함께 허물어버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비판이다.
‘진보’에 대한 케케묵은 색깔논쟁을 감내해가면서, 성장제일주의 경제의 계급적 불평등성을 없애고 국제 경쟁력을 갖춰야 하는 대응작업에 어깨를 걸어야 할 사람들까지 나서서 몰아친다면, 그러잖아도 짐이 버거운 참여정부는 더 가지 못하고 민주주의와 함께 주저앉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일부의 부적절한 비판이 짐짓 수구세력에 정권을 넘겨주고 줄을 서려는 인상을 남길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만,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에서 살아난 뒤, 국민이 뽑은 정통성 있는 민주주의의 위대한 모습을 보수와 수구들에 과시해 보려는 섣부른 오기와 오만, 그리고 숙성 이전의 정책을 함부로 말하는 등의 가벼운 언행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참여정부의 이차적인 과제를 일차적 과제로 끌어올려 가면서까지, 모든 것을 실패로 규정함으로써 수구와 대중을 춤추게 하면서 민주주의까지 함께 위험에 빠뜨리는 비판은 삼가야 할 역사에 대한 성찰과 예의라고 본다.
문득, 근대의 주역 ‘이성’이 제작해서 잘 써먹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생각난다. 그리스 신화의 악당 프로크루스테스는 여행자들의 다리를 자르거나 늘려서 자신의 침대에 맞추지 않았던가. 서구의 ‘근대적 이성’은 인식의 판단기준을 객관세계에서 ‘주체’로 바꿔놓고 규격화·획일화함으로써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비유된다. 진보가 그래서는 안 되잖겠는가.
역사의 진보와 함께 자신의 권력까지 땅바닥에 내려놓고, 수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입길에 오르면서까지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고자 했던 저 노무현을 두고‘실패’라고 단정짓기에 앞서, 저 민주주의가 노무현 대통령까지 걸어오는 그 길고 처절한 과정에서 “과연, 나는 무엇을 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은 어떨지.
심범섭/인서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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