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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3.01 17:39 수정 : 2007.03.01 17:39

한상희/건국대 교수·법학

세상읽기

“그러나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쇠락하는 로마를 ‘빵과 서커스’로 풍자하였던 유베날리우스는 정의를 수호할 책무를 진 자가 타락하게 되면 법과 도덕이 설 자리는 없어진다며 이렇게 경고하였다. 그리고 물질의 쾌락에 빠져 로마의 정신을 갉아먹는 지배층을 향했던 이 외침은 교원평가제에 반대하며 연가투쟁에 나선 전교조 교사들을 무더기로 징벌하였던 교원징계위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대저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법의 지배는 공정성과 품위를 이념적 축으로 삼는다. 국가든 개인이든 법 앞에서 정의를 다투는 자는 모두가 대등한 당사자로서 공평무사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공정성의 원칙이다. 또 이 모든 당사자는 잘잘못을 떠나 언제나 인격체로서 존엄과 가치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 품위의 요청이다. 하지만, 달포 전부터 진행되었던 이 징계위원회는 징계 혐의자의 권리는 물론 그의 인간으로서의 품위마저도 부인하면서 스스로 불법의 극단을 향해 질주하였다.

2월27일 국가인권위 강당에서 진행되었던 ‘징계피해교사들의 증언’은 이 질곡의 현실을 그대로 고발한다. 징계 혐의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진술과 증명을 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부여받아야 함에도 출석한 교사들은 징계위원들의 방해와 저지로 제대로 진술할 수도 없었다. 진술 중에 직원들이 강제로 쫓아내거나 아예 징계위원들이 나가버린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아무런 설명도 양해를 구함도 없이 교사들을 장시간 대기 상태로 방치하고 심지어 심야심문이라는 불법적 행위를 강행하기도 하였다. 그뿐 아니다. 어떤 징계위원회의 경우 대기 중인 교사들을 비디오로 촬영하거나 수십 명의 직원들로 둘러싸 통행이나 외부와의 교통까지도 통제하는 등 위압적이고 모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하였다. 한편에서는 징계위원의 명패를 숨기며 다른 한편에서는 변호인 선임권마저도 부인하면서 교사들의 방어권을 가로막았다.

전교조 교사들이 법과 윤리를 위반했음을 고발하고 그를 징벌하여 바로잡겠다고 나선 바로 그 징계위원들이 스스로 헌법과 인권의 요청들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 감시역이 되어야 할 정부는 오히려 행·재정적 불이익이라는 협박까지 하며 이런 불법을 독려하고 나선다. 유죄의 혐의가 명백한 현행범에게조차 해서는 안되는 일이, 몇 명의 교육관료로 구성된 징계위원회와 참여민주주의를 앞세우는 이 정부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인격과 권리를 주장하던 교사들은 하혈과 저혈압으로 쓰러지고 비인간적 처우에 몸서리치고 여전히 폭압적인 이 땅의 인권현실에 분노하여야 했다.

이에 전교조의 진술투쟁 전략 운운하며 그 불가피함을 변명함은 적절치 않다. 이미 과잉대응의 혐의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자기 방어의 권리도, 인간으로서의 자긍심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처벌을 받기로 낙인찍힌 자와 정복자처럼 군림하며 처벌의 권력을 행사하는 자만이 존재했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 와중에 대통령이 그토록 자랑하던 절차적 민주주의는 완성은커녕 과거 사법살인의 절차에 맞먹을 정도의 폭력으로 퇴행하게 된다. 정해진 규모로 정해진 수준에서 정해진 시간 안에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이 반법치의 사태가 유연한 보수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일상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하여 유베날리우스의 풍자는 여전히 이 땅에서 타당하게 된다. ‘빵과 서커스’의 쾌락만이 가치로운 이 신자유주의의 타락 앞에서 “저 건방진 여자들을 감옥에 던져 넣고 자물쇠를 채워라”고 명령하는 감시자의 부정은 누가 어떻게 감시하여야 할 것인가?

한상희/건국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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