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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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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33년째 ‘섰다’를 치고 있다. 국민 스포츠라는 고스톱도 칠 줄 모르건만 이 장구한 ‘섰다’ 경력은 사실이다. 매해 마지막 날 고교 문예반 동기 8명이 밤새워 판을 벌이는 전통을 1974년 이래 빠짐없이 이어온 것이다. 언제나 그날의 유행어가 있기 마련인데, 지난 연말 친구들은 끊임없이 ‘나, 이대 나온 여자야’를 외치며 와르르 킬킬댔다. 나까지 둘만 빼고 죄다 대학선생인데 학생들이 그 꼴을 봤으면 정말 가관이었을 거다.‘이대 나온 여자를 조롱하는 영화 〈타짜〉’를 나는 며칠 전에야 봤다. 어, 근데 그게 아니었다. ‘나 이대’ 운운은 여주인공 캐릭터를 희화화하는 외마디 대사일 뿐 영화의 핵심도 상징적 대목도 결코 아니었다. 밤새 ‘이화여대’로 킬킬대는 분위기에 섞여 놀다 보니 내용도 모르고 나 혼자 상상을 덧댄 것이다. 누군가가 영화 〈타짜〉를 우리 시대 학벌만능주의를 비판하는 세태풍자 영화로 알고 있다면 감독으로서는 얼마나 기가 막힐 것인가. 반복효과의 주술이 그것이다. 한두 번 웃고 지나가는 농이었다면 그런 기억이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날 밤 친구들은 ‘나 숙대 나온 여자야’를 포함해 수십 가지 버전을 만들어 내며 타짜를 즐겼다.
참여정부와 보수언론이 왜 그리 적대적인지는 앞으로도 두고두고 연구과제가 될 것이다. 심지어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서 긍정적 보도가 98%였던 어떤 신문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89%가 부정적 보도라고 통계에 나온다. 보도의 양을 보면 더욱 놀랍다. 같은 신문에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세 대통령 재임 때까지 사설에서 언급한 대통령 관련 기사가 총 50건 미만인 반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만 이미 276건의 사설이 씌어졌다는 것이다. 서울대 언론정보 연구소의 조사 결과다. 적어도 기자사회에서 노 대통령은 정말 대단한 ‘인기인’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럴까? 그걸 누가 모르느냐고 말하지 말라. 〈타짜〉를 보지 않은 나도 그날 밤 ‘나, 이대’가 나올 때마다 진짜로 재미있어서 따라 웃었다. 무언가를 안다고 할 때 그 전제가 이미 오류나 왜곡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세상에는 부지기수다. 그 앎의 전달과정 자체를 재고해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흔히 다툴 때는 양쪽 말을 다 들어보아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야 공평하고 편견에 지배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사에 대해서 사람들이 쓰는 용어와 평가가 비슷비슷한 것은 다들 언론이라는 필터를 통해 사안을 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론을 통하지 않고 어떻게 세상사를 접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진상을 알기 위해, 무엇보다 공평함을 위해 공격받는 당사자의 말도 들어봐야 한다. 청와대나 장관실을 찾아가자는 농이 아니다. 여과되거나 재조립되지 않은 말을 듣기 위한 약간의 수고로운 노력을 제안한다. 그것은 책을 읽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대 나온 여자’에 해당하는 조기숙 교수의 신간 〈마법에 걸린 나라〉를 적극 추천하고 싶다. “노무현 밑에서 홍보수석을 했으니 뻔한 변명 아니겠어” 하는 사람을 보았다. 나는 정말 묻고 싶다. 변명이든 주장이든 정말로 그들의 말에 귀기울여 본 적이 있느냐고. 사실 그 책은 집권세력의 자기 변호보다는 자성과 미래비전에 더 많은 내용을 할애하고 있다.
이쯤에서 개인적인 푸념을 하고 싶다. 책에서 조기숙 교수는 현실참여 동기를 사명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명감은커녕 너무도 비정치적이기만 한 나는 대체 왜 현 집권층을 애써 옹호하고 싶어 할까. 그 의문에 대한 성의 있는 답변이 바로 이 ‘마법책’에 알알이 담겨 있다.
김갑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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