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3.13 17:35
수정 : 2007.03.13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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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구용/전남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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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우파는 부정부패 때문에 망하고, 좌파는 노선투쟁 때문에 망한다는 옛말이 있다. 두 번에 걸친 한나라당의 대선 패배와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최근 쇠락을 보면 그럴듯한 가르침이다. 그래선지 시야가 흐려진 진보라는 이름의 배에서 영웅들이 속속 뛰어내리고 있다. 카산드라처럼 ‘배가 침몰한다!’고 외치며 뛰어내린 허공에는 중도의 깃발이 바람을 타고 솟구친다.
중도의 깃발을 처음 세운 것은 2005년 여름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이다. 아무도 따르지 않던 깃발 아래 웅성거림이 시작된 것은 올해 초 열린 종교시민사회단체 신년모임이다. 현실정치의 한복판에 원로들이 모였다. 박원순, 이부영, 김지하, 이석연, 안병직, 박세일 등. 여기에 최근 황석영, 백낙청, 홍윤기가 가세했다. 중도론은 주장하는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그 색깔도 다양해 보인다. 그러나 색칠만 다르게 했을 뿐 바탕 그림은 유사하니 질적 차이는 사소하다.
중도론에 따르면 한국은 진보와 보수의 극단적 대립 때문에 위기에 직면했다. 분명 한국 정치의 위기는 이념적 차이가 사소한 정치 패거리들 간의 격렬한 권력투쟁에서 비롯되었다. 다른 것끼리의 제한 경쟁은 새로운 이념의 바다를 찾아가는 과정이지만(블루오션), 같은 것끼리의 무한 경쟁은 제 땅을 피로 물들이는 전쟁이다(레드오션). 피를 나눈 형제들의 유산싸움처럼 차이 없는 종족 간의 싸움은 동일한 것의 반복이고 무절제한 증식이다. 이런 싸움 그만 하자는 중도론의 진정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를 더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 그들 자신이 이제는 진보가 아니라는 것, 보수와 이념적 차이가 크지 않은 중도라는 것을.
계몽주의에서 시작된 진보의 이념은 오래전부터 위기에 직면했다. 계몽주의는 과학(기술), 국가(법), 시장(자본)의 발전이 인간적 삶의 참된 진보라고 약속한다. 그러나 계몽의 약속이 허구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면서, 진보는 계몽과 다양한 형태로 결별한다. 과학, 국가, 시장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적으로 강조하거나 불신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헤겔처럼 인륜적 국가에서 희망을 찾거나, 마르크스처럼 국가와 시장을 경계하고 과학을 통한 생산력 증대에서 진보의 가능성을 찾는 경우다. 그러나 세계대전과 소련 붕괴 이후 과학·국가·시장의 발전이 오히려 인간적 삶을 피폐화시켰다는 비판이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최근에는 진보 자체를 부정하는 탈현대론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은 과학, 국가, 시장에 대한 맹신이 지배한다. 보수는 어느덧 과학지상주의, 국가지상주의, 시장지상주의를 앞세워 전선에 나섰지만, 인간해방을 지향하는 진보는 무장해제된 것처럼 보인다. 본래 보수는 이념이 없다. 승리한 것이 정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반면 진보는 정의가 승리하는 현실을 꿈꾼다. 따라서 폭력과 무시, 억압과 소외, 배제와 불의가 있는 곳에서 진보는 끝나지 않는다. 다만 새로운 상상력을 끝없이 요구할 뿐이다. 진보는 이제 ‘우리’의 이름으로 무시되고, 배제되고, 소외된 타자의 시선으로 과학·국가·시장을 인간화할 수 있는 서로주체의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
한국의 진보세력은 매판과 독재에 저항하며 정치적 민주화를 실현했던 것처럼, 이제 성장과 분배, 자유와 자연이 함께하는 경제·문화적 민주화의 길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중도는 성장주의 미몽에 감금된 보수에 항복하는 통합일 뿐, 새 길이 아니다. 새로운 진보는 ‘같음’으로 환원되지 않는 차이에 대한 감수성을 단련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학자들은 권력투쟁이 아닌 권력비판의 전선에 있어야 한다.
박구용/전남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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