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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범섭 인서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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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20세기 냉전의 유산에 햇살이 들고 있다. 봄기운이 한반도의 눈 덮인 산야와 꽁꽁 얼어붙었던 분단 역사의 뿌리까지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반가운 일이지만, 하나의 의아함이 고개를 든다. 미국이 이번 ‘2·13 합의’에서 보여준 유연함은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기에 이로 말미암아 남북의 지각변동은 물론 동북아의 평화와 세계 분위기까지 확 바꿔놓지 않을까 하는 반가움도 있다. 그러나 어떤 작은 불안이 마음에 깔리고 있음은 왜일까. 이번 2·13 합의에서 드러난 미국의 변화는 그 합의가 가져다줄 한반도의 지각변동과 함께 세계를 변화시킬 또 하나의 엄청난 변수가 될 징후란 점에서 그 의미를 몇 가지로 정리해 보자.첫째, 이번 2·13 합의에 미국·중국·일본·러시아가 참여했지만, 이들이야말로 한반도 분단을 기획하고 고착화하는 데 직간접 책임이 있는 나라들이란 점에서 6자 회담 틀과 그 합의는 그 마무리까지를 좋게 바라볼 수 있는 제대로 된 틀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한반도의 허리에서 자신들의 전쟁놀이가 남긴 ‘이념의 충돌’을 반드시 청산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이를 위해 결자해지로 만났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이번 2·13 합의에서 분단의 당사자인 남북 정부 당국자가 모처럼 거리낌 없이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제몫을 했다는 점이다. 이는 2·13 합의를 이끌어낸 6자 회담이야말로 한반도 분단의 원인 제공자와 피해 당사자가 모두 참여한 합리적이고 합당한 틀이라는 점을 확인해 준다.
셋째, 6자 회담은 북한 핵문제를 풀어내고자 했지만, 우리는 이 과정에서 국제사회의 모든 문제가 결국은 ‘무력’으로 결판나던 ‘이념의 시대’가 과거로 흘러가고 이제는 ‘평화’와 ‘사랑’이 새로운 가치로 떠오르고 있음을, 새로운 시대의 등장이 가까워오고 있음을 예감하게 되었다. 특히, 미국의 유연함에서 우리는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 냈던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이 지닌 ‘사랑’의 힘이 21세기 단극체제에서 아직까지 이렇다 할 시대적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채 전쟁터를 방황하던 미국으로 흘러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넷째, 이제 우리 스스로 분단체제를 허물어내고 통일로 가는 능동적인 작업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통일에 걸림돌이 되는 정책과 제도를 정비해야 하지만, 국가보안법의 폐기는 당장
서둘러야 한다. 그리고 남북 정상이 정례적으로 만나는 일과 이번 2·13 합의를 확실하게 담보하는 6자 정상회담, 그리고 남북한과 미국의 3자 정상회담도 필요하다고 본다.
끝으로, 분단구조의 내부갈등을 없애야 한다. 남북 주민의 의식전환이야말로 통일로 가는 절대적인 요인이다. 오랜 분단사가 우리 안에 쌓아놓은 모든 적대관계와 이질성을 우리 스스로 청산해야 할 것이다. 근래 극우성향의 집단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른바 ‘정권을 되찾고 처단해야 할 사람들의 명단’이 인터넷을 떠돌고 있다. 삼백 수십 명의 실명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각 분야를 대표하는 지식인들과 민주화 운동 인물들이 망라돼, 정체를 숨기고 있는 분단의 괴물에 위협을 받고 있다. 어느 누구의 치기어린 짓일지 몰라도 참으로 섬뜩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민주주의는 그런 게 아니다. 보지 않았는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박정희기념관 제안이나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민주주의는 원칙과 타협과 화해,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이 그 근본임을 알아야 한다. 이제 아무도 통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통일은 함께가는 것이다.
심범섭 인서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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