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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4.03 17:30 수정 : 2007.04.03 17:30

박구용/전남대 교수·철학

세상읽기

학벌사회에서 기득권을 향유해온 세력들이 ‘삼불 정책’(본고사, 고교등급제, 기여입학제 금지)을 빌미로 교육문화를 조직적으로 흔들고 있다. 이들의 바람잡이에 언론이 박자를 맞추고 대통령 후보들이 춤을 추면서 시민들조차 들썩인다. 삼불 담론은 존폐 여부를 놓고 두 편이 서로 나름의 논거를 가지고 팽팽하게 맞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처음부터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한 허위 담론일 뿐이다.

삼불이 대학의 자율성과 경쟁력을 훼손하는 암초라고 강변하는 쪽(폐지론)과 교육의 정의와 사회적 연대성의 마지막 ‘지킴이’가 삼불이라고 주장하는 쪽(존치론)의 대결구도로 짜인 담론은 한국 교육의 망국병이 입시정책에 따라 치유될 수 있는 것처럼 위장한다. 삼불이 교육의 형평성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주장하는 존치론도 자칫 이 나라 교육에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삼불의 존폐와 무관하게 학벌과 자본의 첨병으로 전락한 입시교육은 단지 사육일 뿐이다. 따라서 사육 체계의 뿌리를 잘라내지 못할 때 참교육계는 학벌과 자본에 물음표를 빼앗긴 채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

물음표를 빼앗기는 것은 답안지만이 아니라 자유까지 빼앗기는 것이다. 자기 문제로 고민하지 못하고, 남이 만든 문제로 씨름하는 것은 노예들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삼불=삼류’라는 폐지론의 공식은 대학의 자율성과 경쟁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율성과 경쟁력을 잃은 자신들의 책임을 교육정책과 학생들에게 떠넘기려는 술책이다. 술책에 기만당하지 않으려면 먼저 물음표를 찾아와야 한다.

자율적 경쟁이 아닌 타율적 특혜를 받으며 ‘하늘’(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등 이른바 명문대)을 누비는 대학들조차 지구적 경쟁력이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학생 선발에서 지배계급 재생산에 이르기까지 온갖 특권을 누리고 있고, 그 때문에 모두가 치를 떨면서도 그들이 독점한 하늘에 가기 위해 생사를 걸고 전쟁을 한다. 그러나 문제풀이 전쟁에서 승리한 학생들 중 삼류 교육을 제공하는 대학의 연구력에 물음표를 던지는 이는 없다.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본 경험이 없는데다, 특혜를 거부하고 자유경쟁을 할 자신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공 이데올로기에 젖어 노예처럼 문제풀이에만 매달리는 사람은 자율적으로 문제를 찾아가는 사람과 경쟁할 수 없다.

자율성 없이 경쟁력도 없지만, 경쟁만으로 자율성이 생기지는 않는다. 자율성은 문제풀이 경쟁에서 이긴 홀로주체의 몫이 아니라, 낯설고 새로운 타자와 만나 소통하고 연대할 수 있는 서로주체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자율적 서로주체는 남이 출제한 문제를 푸는 데 골몰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물음표를 던지며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다. 더구나 지식기반 경제가 요구하는 문제해결 능력도 문제풀이보다 문제찾기 능력을 가리킨다. 그런데도 사교육뿐만 아니라 공교육조차도 오래전부터 남이 만든 문제 풀이에 몰두하는 노예들을 사육하는 기관으로 전락했다. 문제찾기의 권리, 즉 자유를 빼앗긴 청춘들의 신음소리가 온 나라를 뒤덮어도 가해자는 들을 귀가 없다.

대학은 학문공동체다. 학문은 자율적 문제찾기에서 시작된다. 문제풀이에만 능수능란한 사람은 학문 광장에 들어설 수 없다. 그러나 학벌사회는 외국 학자가 만든 문제를 빨리 수입하는 교수에게는 큰 권력을, 그 문제를 노예처럼 푸는 학생에게는 작은 권력을 나누어 준다. 삼불 담론은 질정관으로 넘쳐나는 대학의 무능력을 은폐하고 그들의 특권을 연장하기 위해 비싼 이자를 지급하고 빌려온 삼류 문젯거리다. 물음표를 빼앗긴 들에도 봄이 찾아왔지만 봄조차 빼앗긴 청춘들이 문제풀이 교육의 문제 찾기에 나설 때다.

박구용/전남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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