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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희/건국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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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두고 정부가 하는 일이 점입가경이다. 모든 정부 부처가 선전홍보에 매달려 장밋빛 전망으로 현혹하면서도 정작 협상내용을 묻는 시민들에게는 입을 다문다. ‘이 항목은 이래서 문제’라고 지적하는 시민단체에는 ‘알지도 못 하면서 함부로 말한다’고 비난하면서도 그럼 알려달라는 요청에는 단호하게 ‘불가’를 외친다.심지어 이 협상이 ‘타결되었는가’라는 질문조차 얼버무리며 넘어간다. 타결 그 자체가 지상과제로 되면서 협상기일까지도 양보해야 하였던 협상단이 막상 타결이 선포된 이 시점에 와서는 ‘더 이상의 협상은 없다’라는 단호함보다는 이런저런 수식어로 눈치보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답답해진 국회의원들의 재촉에 마지 못해 협상안을 공개하겠다고 하면서도 미국과의 관계 때문에 “보안을 전제로 해야 한다”느니 공개를 “해보기는 하겠지만 걱정된다”느니 하면서 김을 뺀다.
그리고는 이 비밀주의를 이용해 자의적인 해석과 견강부회로 협상 결과를 변명하거나 미화하기에 여념이 없다. 투자자-국가 제소제는 초국적자본이 부동산정책 등 우리 공공정책을 옥죄는 수단이 될 것이라는 시민사회의 비판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처음에는 비판 자체를 부인하다, 부동산정책은 예외로 한다고 발뺌하더니 이제는 부동산가격안정화 정책을 예외로 하기로 했다 한다. 그러나 이런 말바꿈 속에서도 어떤 조건이 어떻게 달려 있는지는 여전히 ‘비밀’이다.
애초 반대 쪽에 있던 법무부는 생뚱맞게도 대표적 남용사례인 에틸사건과 메탈클래드사건을 옹호하고 나서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분석에는 초국적 자본과 정책 결정자들 사이에 일어난 퀘퀘한 로비 행각들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들의 이전투구에 정작 피해를 본 것은 초국적 자본도 그 정부도 아닌 환경이자 지역주민들의 건강이며, 시민들의 참여 속에서 형성되었던 공공선의 미덕이었다는 사실은 과감하게 생략해버린 것이다.
문제는 유리한 것만 극도로 강조하고 불리한 것은 아예 은닉해 버리는 이런 식의 왜곡에 그치지 않는다. 앞으로 각종 국책연구원들이 쏟아 낼 산업영향 평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실제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경제성장의 동력이 될 것이라는 한 국책연구원의 분석 결과를 놓고 그것이 왜곡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국회에서까지 문제삼았던 적도 있었다. 그 문제가 아직도 채 정리되지 못한 상태에서, 보도에 따르면 또다시 관련 국책연구원들이 총동원되어 유사한 형태의 산업영향 평가작업을 할 모양이다.
하지만 이들 또한 비밀주의에 함몰되어 있다. 어떤 통계치나 기초자료 혹은 원자료를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분석하였는지는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 분석결과가 올바른지 아닌지는 아무도 검증할 수 없다. 오로지 국책연구원의 최종발표만 바라보고 믿거나 말거나를 선택해야 할 뿐이다. 그래서 어떤 국책연구원은 이 협상 결과 7%의 성장이 가능하다고 전망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겨우 0.28%의 국내총생산(GDP) 상승에 그칠 뿐, 실제 중요한 개인 가처분소득은 12조원 감소한다고 추정하는, 이 정반대의 주장에 대해 우리들은 하릴없이 머리만 긁적일 수밖에 없어진다.
결국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말은 현세에 와서 의미를 잃어 버리고 말았다. 국민의 판단에 필요한 모든 정보들은 정부가 쥔 판도라의 상자에 갇혀 있는 이 상태에서, 국민은 이미 정부의 적이 되었거나 아니면 국민 자체가 정보를 박탈당하여 시나브로 죽어가고 있음을 이미 적에게 노출하였거나 둘 중의 하나만이 남아 있다. 어쨌거나 이 전쟁은 이길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
한상희/건국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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