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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4.15 17:23 수정 : 2007.04.15 17:23

김갑수/문화평론가

세상읽기

벚꽃 흐드러진 요코하마의 거리는 아름다웠다. ‘모모노 아와레’라고 하나. 아침 햇살을 받고 화사하게 피어났다 바람에 흩뿌려지는 ‘사쿠라’ 꽃잎에서 느껴지는 어떤 무상감을 그네들은 특유의 감수성으로 이해하고 사랑한단다. 아침 일찍 숙소 앞 야마시타 공원과 항구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아침의 정적, 그것이다. 일본 개화기의 외국인 거주지였던 야마테 언덕의 서양식 집들은 외지인을 위해 문을 활짝 개방하고 있었다. 베릭이라는 영국인이 지어놓은 대저택에 들어서니 어깨가 좁은 여인이 바흐의 평균율을 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정적, 오후의 정적이었다.

‘고독에 몸부림치는’ 교환교수 친구를 둔 덕분에 올해에만 벌써 두 번째 방문이다. 중년의 사내 둘은 걷는다. 며칠이고 무조건 걷는다. 유흥가와 문화유적지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 사는 골목과 거리를 한없이 걷고 또 걸으며 실없는 소리나 주고받는다. 가끔 하는 ‘실 있는’ 말은 가령 일본 문화가 타인에 대한 배려에서 출발한다는 것, ‘아마에’라고 하는 일종의 응석부리기가 일본 남성성의 특징이라는 것, 그리고 장장 230만부가 팔려나가며 일본 열도를 열광시키고 있는 후지와라 마사히코의 저서 <국가의 품격>에 관한 내용들. 교환교수가 1년을 체류하며 느낀 종합소견은 이렇다. 한국은 개인이 편안하고 사회는 불안한 반면 일본은 그 반대라는 것. 바꿔 말해 한국인은 자기 정서는 잘 드러내는 반면 남의 정서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고, 일본인은 자기 정서는 숨기고 남의 정서는 예민하게 파악한다는 것이다. 두 나라에 편안과 불안의 역전현상은 그래서 일어난다.

웬 뜬금없는 일본론이겠는가. ‘에프티에이 사태’ 때문이다. 사태? 그렇다. 사태는 사태다. 표현 중에 정말 웃긴 게 ‘아이엠에프 사태’라는 말이다. 스스로 부도위기를 불러일으켜 놓고 그걸 구제해주러 온 금융기관의 이름을 붙여 우리는 사태라고 불렀다. 마치 그 기구가 외환위기의 원흉이기나 한 듯이. 하지만 그런 오해가 옳았다. 아이엠에프를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외적으로 인식하고 전국민이 억척스레 달려들었기에 그럭저럭 사태는 해소됐다. 속도의 문제로 보이는 한-미 에프티에이 협상도 이처럼 격렬한 전사회적 논란으로 보건대 옳게 가는 사태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내 개인의 문제는, 어떤 의견을 갖기가 정말 난감하다는 점이다. 신문기사도 열심히 찾아 읽고, 티브이 토론도 보고, 몇몇 단행본도 들여다봤지만 한마디로 누구 말이 옳은지 정말 모르겠다.

일본 거리를 걷다 보면 모든 것이 일본적으로 느껴진다. 전세계 문물이 용광로처럼 녹아드는 곳이 일본인데 그렇다. 우리는 원산을 알 수 없는 외래종을 ‘국적불명’이라고 비판하지만, 일본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국적불명으로 변형되고 그것은 곧 일본적으로 치환된다. 거부감 없이 적극적으로 개방을 하되 주체적이고 지혜롭게 했다는 의미다. ‘선진국’ 일본은 400년 전 나가사키 개항, 즉 개방과 더불어 출발했으니 개방의 최고 모범사례가 아닐 수 없다. 한-미 에프티에이 협상의 우리쪽 논점은 개방담론이라고 볼 수 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개방이라면 정부의 추진방침이 옳아 보이고, 영리하고 주체적인 개방이라면 현재의 협상 반대파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단, 매국 대 애국으로 몰고 가는 일부 날선 주장은 자기 이해관계에 집착한 생떼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십여 차례 방문하며 체험한 일본식 정적의 분위기를 선망한다. 정적 속에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에프티에이 사태? 지금은 잠시 정적이 필요한 단계가 아닐까.

김갑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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