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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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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쾌락이 증가한 만큼 고통도 깊어지는 것이 역사라지만, 고통의 체념이나 미화는 반역사적이다. 자유는 불의 때문에 생긴 고통을 못(안) 느끼는 것이 아니라 제거하려는 역사적 의지고 실천이다. 따라서 자유의 학문인 철학은 제 땅에 넘쳐나는 고통의 뿌리인 억압과 배제를 비판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한국의 철학자는 그 때문에 무엇이 허세욱씨를 죽음으로 내몰았는지 밝혀야 할 의무가 있다.사회적 정의나 역사적 사명을 위해 자기 몸에 불을 사르는 사람은 없다. 살아 있어야 정의도 의미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사후세계의 절대적 자유와 정의를 약속하는 종교조차 자살을 권고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강요된 죽음만 있을 뿐, 자발적 죽음은 없다. 자살은 목숨이 아니라 관계를 끊는 것이며, 현실이 아니라 마음의 고통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성적비관이나 생계비관 자살이라는 말을 하지만, 성적이나 생계 때문에 자살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유로 괴롭히는 사람이 타살한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이나 사회가 배척한다고 모두가 죽지는 않는다. 억울해도 발언권을 가진 사람은 삶을 택한다. 말할 기회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인정받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소외된 상태에서 언어까지 빼앗긴 사람은 끝없이 저승사자와 싸워야 한다. 승리는 대부분 산자의 몫이지만, 그 대가는 작지 않다. 감금된 상태에서 말조차 빼앗긴 사람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것조차 멈춰야 한다.
허세욱씨는 생각을 멈출 수 있는 노예가 아니었다. 그는 참여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포함한 소외계층의 발언권을 빼앗아 갔다는 것을 알고 잃어버린 언어를 되찾고자 싸웠다. 그러나 참여정부의 거짓말을 고발하는 그의 참말에는 메아리가 없었다. 자유인 허세욱씨에게 삶과 죽음의 차이가 공허해진 순간이다.
참여정부가 출범하던 날, 농사꾼인 어머니의 전화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우리도 이제 고생 끝났지!” 어머니의 말에는 바보 대통령이라면 당신의 언어를 이해할 것이라는 믿음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4년 뒤 그는 똑똑해진 대통령으로부터 ‘농업은 경쟁력이 없고 그 때문에 가치도 없다’는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내 어머니는 자신의 삶을 통째로 부정하는 정치현실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비정한 현실과 온몸으로 대면한 사람, 그가 바로 허세욱씨다. 그의 죽음은 거짓말과 참말을 혼동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양치기소년 이야기는 거짓말이 도덕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용적으로도 유익하지 않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비판은 언제나 마을 사람들을 비켜간다. 그런데 늑대가 판치는 세상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 홀로 양심의 거울만 닦는다고 양들이 안전할 수 없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 참말과 거짓말을 구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따라서 참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한 마을사람들도 소년만큼 책임이 있다. 무책임한 마을사람이 넘쳐나면 양들은 계속 죽어갈 수밖에 없다. 허세욱씨의 죽음에 우리 모두가 책임이 있는 이유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손익계산으로 온 나라가 분주하다. 손해가 있는 분야는 보상하겠다는 약속은 거짓말일 뿐이다. 이 땅의 들녘을 지켜온 민중은 손해 본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삶은 계산되지 않는다. 삶의 의미를 빼앗은 대가는 보상이 아니라 죽음이다. 정치인은 행위 결과에 책임을 지는 실용주의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만 원칙(정의) 없는 실용주의는 참된 정치철학이 아니라 시신애호증 환자의 미학일 뿐이다.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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