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범섭 인서점 대표
|
세상읽기
4월은 진정 잔인한 달인가. 대체 그는 왜 그토록 잔인한 짓을 저질렀던가. 이 사건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교내 총기난사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버지니아 경찰은 아직까지 범행의 동기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그렇게 잔혹했던 버지니아공대 교정도 점차 충격과 슬픔을 덮고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는 소식이다. 다시 한번 가신 이들의 명복을 빈다.그리고 범인 조승희에게 아니 ‘승희 조’에게 “그토록 도움이 절실했던 너를 돕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고 따듯한 말을 걸어 준 버지니아공대의 아름다운 지성과, 또 이 참극을 개인의 문제로 이해하면서 용서와 화해의 인간정신을 유감없이 보여준 미국 정부와 시민사회에 깊은 경의를 보낸다.
미국은 물론 아시아와 지구촌 전체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던 이 사건은 그러나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한 청년이 세상을 향해 폭발시킨 증오와 적개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와 함께 승희 조가 ‘너’라고 지칭한 ‘그 무엇’에 대하여 주목해 보기로 하자.
하이데거는 일생 동안 ‘죽음’ 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현존재’로서의 ‘인간의 의미’를 추적했다. 그는 ‘공허의 공간’에 그냥 ‘내던져지는 존재’가 인간이라며, 거기서 인간은 ‘권태’라는 ‘존재적 기분’에 빠져 단지 ‘시간을 죽이는’ 삶을 살아갈 뿐이라고 했다. 이런 견해에 카뮈는 ‘시간을 죽이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고,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기억 속의 지속〉에서 자신의 삶을 ‘흐물흐물 죽어가는 조갯살 같은 시간’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참사의 동기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버지니아 경찰의 발표를 보면서 언뜻 떠오르는 게 있다. ‘이야기’도 ‘사건’도 ‘없이’ 그냥 ‘시간 죽이기’만을 주제로, 폐관 직전에 있는 프랑스 파리의 한 소극장 바빌론을 일약 세계적인 명소로 바꿔놓으면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20세기의 대표 희곡으로 올려놓은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이 그것이다.
영문학을 전공하던 승희 조가 조롱을 받으며 세상의 한구석으로 내몰려 외톨이로서 ‘시간을 죽이며’ 하이데거의 ‘무한한 공허’의 공간에 사뮈엘 베케트가 그렇게 기다리던 ‘고도’를 맞아들여 그 ‘고도’를 중심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사실 ‘고도’는 베케트조차 그 의미 설명을 꺼리는 것이지만, 이는 무신론자, 특히 휴머니즘의 신앙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승희 조가 ‘고도’를 맞아 공허하기만 했던 자신의 공간을 완전한 세상으로 창조해 놓은 다음, 자신의 이 유토피아 저 건너편에 존재하는 인간의 세상을 향해 ‘이스마일의 도끼’를 들고 ‘대평원’을 건너 ‘신의 정벌’ 길에 나선 것이 이 사건의 궁극적 이유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적 능력은 세상을 거대한 조직으로 만들었으며 그 힘으로 문명을 창조했고 드디어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해방은 결국 인간의 육체가 할 일이나 사고가 할 일을 앗아가고 말았다. 거기서 우리는 고도로 분화되어 나의 삶과는 아무 상관없는 전문화된 지식과 전문화된 세계의 한 부분으로 갈가리 찢어진 세상의 한 부분으로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며 시간을 죽이는 또다른 나와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는 이미 완벽한 하나의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어렵다. 고도를 기다리던 승희 조가 육체를 버리고 떠났듯이, 어느 누구도 공허한 내 안의 공간에서 고도를 기다리는 어떤 씨앗이 없다고 장담하지 못한다면….
심범섭 인서점 대표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