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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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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약간 쌀쌀한 오후, 주택가 골목길에 옹기종기 모여 무언가를 열심히 의논하는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여섯살에서 아홉살 정도 되었을까? 다섯 아이는 나를 부르더니, 내가 다가가자 “강아지 키우세요?”라고 떠들썩하니 물었다. 키가 제법 큰 여자아이가 든 상자에는 강아지가 담겨 있었다. 길 잃은 강아지인데 누가 데려다 길렀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애완견을 키울 조건이 되지 않는다고 했더니, 아이들은 시무룩해졌다.다음 순간 한 남자아이가 입을 열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나 되었을까, 똘똘한 눈매의 아이는 내게 “이 강아지가 밉게 생겼어요?”라고 따지듯이 물었다. 사실, 애견 전용 미용실에서 털 손질을 받고 호강했을 ‘공주과’는 아니고, 야윈 몸매와 길쭉한 얼굴을 한 강아지였다. 뉘 집에선가 싸안고 기르다 이젠 미련없이 버렸을지도 몰랐다. “밉기는 왜 미워. 강아지가 그렇지 뭐”라고 대답하자 그 아이는 “어떤 할머니는 강아지가 밉게 생겼다고 발로 막 차시더라고요. 그럼 안 되지요. 생명인데”라고 말했다. 말하는 것이 하도 신통해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면서도 어물쩍거리며 “그러게, 그러진 말아야겠구나”라고 말하는 나에게, 아이는 다시 한 번 못마땅한 어조로,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생명인데”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이의 입에서 거듭되는 “생명인데”란 말에는 듣는 사람의 마음에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었다. 어린 시절 애완동물을 비롯해 아끼는 대상에게 사랑을 준 경험은 누구나 있겠지만, 우리 세대가 성장하던 무렵에는 그런 체험 속에서 생명 존중이란 말을 떠올렸던 것 같진 않다. 그런데 이 작은 아이는 자기 나름의 논리와 어휘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말에는 애완동물이건 다른 어떤 상대이건, 타자를 대상화시킨 채 자기 감정을 일방적으로 투입해서 소비하다 버리는 소모품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하는 도저한 인문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요즘 아이들은 경쟁과 어리광 사이에서 자기중심적이고 영악하게 자란다고 말하는 어른들이 많다. 아이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물론 어른 자신이다. 학벌 지상주의에 매여 아이들을 한 학원에서 다른 학원으로 정신없이 뺑뺑이 돌리면서 어른들 성취욕구의 대리수행자로 삼는 기성세대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자란 뒤 이른바 명문대학 상급학년이 되어서도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고 말하는 젊은이가 적지 않다. 반면, 그러한 교육의 문제점들을 인식하고 대안교육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부모들도 적지 않다. 나를 놀라게 한 그 아이는 필시 삭막하고 야멸찬 도시의 삶 속에서도 인간과 사물을 아낌과 존중과 배려의 태도로 대해야 한다고 조곤조곤 이야기하며 함께 책도 읽어주는 부모나 교사의 가르침 아래 자랐을 것이다. 아이의 뒤편에, 훌륭한 교육자로서의 성인이 20세기식 성장주의를 거부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향해 아이에게 신경을 쏟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낮고 불쌍한 존재를 구박하는 어른을 당당하게 나무랄 줄 아는 작은 아이의 마음씨가 논리의 뒷받침을 받을 때 사람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관계가 태어날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어렵다.” 오래 전에 배운 그리스어 문장이었는데, 플라톤이 한 말이라고 했다. 이는 묵묵히 혼신의 힘을 다하는 인간정신의 고투 끝에 얻어지는 한 자락의 영속적인 아름다움. 그런 아름다움을 표현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또한 아주 가까이 있다. 거리에서 만난 한 작은 아이가 그것을 보여주었다. 이 아이들은 우리 세대가 가지지 못했던 담론과 생명의식과 창의력과 상상력을 가지고 세상을 이끌 것이다. 기성세대는 이를 장려해 줄지언정 가로막아서는 안 될 노릇이다.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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