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패밀리사이트

  • 한겨레21
  • 씨네21
  • 이코노미인사이트
회원가입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7.05.15 18:23 수정 : 2007.05.15 18:23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

세상읽기

칠흑 같은 어둠과 정적이 지배했던 도시 광주. 그러나 27년이 지난 오월의 밤거리는 향락에 빠진 불빛으로 요란하다. 더는 어둠을 경험할 수 없는 도시민들에게 저지되고 만류된 욕망은 없어 보인다. 1980년 독재자가 “여기는 바깥이다. 체념하거나 목숨을 바쳐라!”고 명령했다면, 오늘의 지배자는 “여기가 낙원이다. 바깥은 없다. 즐겨라!”고 외치는 듯하다. 환락과 향유가 자유의 이름으로 도시를 포장하지만, 누구도 ‘우리 안의 바깥’에서 밀려오는 불안과 고통에 전율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라진 것은 고통이 아니라, 고통을 느끼고 생각하는 상상력이다.

1980년 5월27일, 탱크 지나가는 소리가 불빛을 잃은 금남로의 새벽녘 밤하늘을 가르고 있을 때, 왜 시민군은 ‘죽음의 집’ 도청을 떠나지 못했을까? 큰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함께 싸우다 먼저 간 동지에게 등을 보일 수 없었고, 둘째, 노예적 삶을 청산하고 주인이 되려 하지 않고 서로 함께 자유인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택시와 버스기사의 차량 시위, 양동시장 아주머니와 시민들의 주먹밥 지원, 성매매 여성이 합세한 헌혈, 투사회보와 결집대회를 통한 의사소통, 시민수습위원들의 죽음의 행진. 광주는 서로가 주체인 민주·인권·평화의 도시였지만, 시민군은 ‘자유의 집’ 도청을 지키다 총탄을 맞는다.

의리나 우정 때문이 아니라, ‘서로주체’였던 동지들의 죽음을 외면하고 ‘홀로주체’가 될 수 없는 비극적 운명을, 죽음의 집이 자유의 집임을 알았기에, 인간다운 삶이 삶의 바깥에 있는 자신들의 존재근거를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민군은 이렇게 삶의 바깥으로 나감으로써 우리 안에서 나와 너를 가르는 장벽을 잠시나마 무너뜨린 것이다. 그 때문에 지금도 5·18은 ‘우리 안의 바깥’으로 밀려난 타자가 위로받을 수 있는 마지막 안식처다.

많은 동학농민군들이 자기 집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양반집 빼앗아 제 집 삼으려고 그랬을까? 아니다. 양반집도 헌집이다. 그들이 원한 것은 너와 내가 ‘서로주체’로 살아갈 새집이었다. 그러나 새집은 그들에게 목숨을, 살아 돌아와도 굴욕의 증거인 헌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단을 요구했다. 그 힘으로 동학농민군은 위대한 자유의 집을 짓는다. 그 집을 지키려고 들불처럼 일어나 꽃잎처럼 쓰러진 수많은 민중의 넋이 바로 5·18 시민군의 동지였다. 그러나 조작된 욕망의 깃발만 넘실대는 지금의 밤거리에서 누가 시민군을 동지로 생각하는가?

프란츠 파농이 말하기를, 저항을 멈춘 흑인은 그들의 주인이었던 백인이 되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들은 백인의 피부와 자신들의 피부를 동일시하지 않을 만큼은 영리했지만, 백색 가면을 거부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들은 백인이 흑인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자신을 감시하고 질책하는 가운데 백인이 된 듯 도취했다. 그러나 하얀 가면을 걸친 검은 피부의 노예, 주인이 되려는(된) 노예에게 해방은 찾아오지 않았다. 역사는 백인이 노래하는 민주와 인권의 존중이 해방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순진성을 벗어던지고 투쟁한 사람들의 생명을 요구했다.

지금 우리는 하얀 가면을 걸친 흑인과 무엇이 다른가? 가난한 사람은 부자의 시선으로, 공부 못하는 학생은 잘하는 학생의 눈빛으로 자신을 질책하며 가면무도회를 떠돈다. 모두 다 부자가 되고 1등이 되려는 도시에는 생각을 멈춘 향락만이 끝없이 전이된다. 5월, 그날이 다시 왔건만 모두가 주인이 되려는 세상에는 노예들로 넘쳐난다. 그만큼 ‘우리 안의 바깥’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는 커져가지만, 그 소리를 듣는 귀는 작아지고 있다.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세상읽기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많이 본 기사

전체

정치

사회

경제

지난주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