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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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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조선이라는 ‘오지의 왕국’을 탐험한 시점이 1895년이었다. 그녀의 기행문에 담긴 왕국의 모습은 부패한 지배층, 몽매하고 무기력하고 불결한 백성, 아름다운 산천으로 특징지어진다. 전형적인 비문명권 나라의 초상이 그려졌다. 11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외국의 신뢰할 만한 지성인에게 새로운 한국 탐사를 의뢰한다면 어떤 글이 씌어질까. 자칭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역시 자칭 다이내믹 코리아로 변신한 오늘날 어떤 면모가 가장 특징적인 인상으로 그려질지 자못 궁금하다.그런 발상의 프로젝트가 2005년 미국에서 행해졌다. 약 170년 전 프랑스의 역사학자 토크빌이 장기간의 미국여행 끝에 남긴 명저가 〈미국의 민주주의〉다. 토크빌의 여정을 따라 1년 남짓 21세기 미국을 재탐험한 인물은 유럽의 지성으로 존중받는 휴머니스트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였다. 레비는 미국의 인상을 ‘현기증’(vertigo)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했다. 그래서 책 제목이 〈아메리칸 버티고〉다.
설마 레비쯤 되는 인물에게 미국에 대한 사전 이해가 부족했을까. 하지만 선입관과 기존 지식을 떨쳐 버리고 찬찬히 달려본 1만5천마일의 미국은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어딜 가나 웬 깃발을 그렇게들 내세우는지, 별것도 아닌 오만 잡동사니를 그렇게 기념물로 만드는지. 그런데도 레비는 자신의 생각을 반-반미주의자(안티-안티아메리카니즘)라고 설명했다. 석학의 글로서는 좀 거칠다 싶은 표현을 인용하자면, “마치 고장난 자동인형들처럼 그저 ‘그건 미국의 잘못이다! 이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건 언제나 미국의 잘못이다!’만 반복해서 외쳐댈 줄밖에 모르는 정신병자들” 때문에 안티의 안티를 자처한 것이다. 그가 지목하는 자동인형이란 맹목적 애국주의, 패권주의, 순수혈통주의, 자민족중심주의, 인종주의, 근본주의에 빠진 부류들이다.
2년여 동안 〈한겨레〉의 ‘세상읽기’에 참여하면서, 앙리 레비가 그러했듯이 마치 처음 보는 양 새삼스럽게 우리 사회를 관찰한 내게 대한민국은 앞서의 그 많은 병적인 ‘주의’가 총체적으로 구현된 자동인형들의 천국으로 다가왔다. 성장한 우리 사회의 저력과 가능성을 찾아보겠다던 애초의 결심은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왼통’ 개탄과 통분의 사설만 늘어놓은 꼴이라 민망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왜 그래야 했는지 항변하고 싶다. 맹목적 애국주의에서부터 우둔한 근본주의까지 그 무수한 저급의 ‘주의’들의 원인 진단에 큰 문제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과연 그것이 대통령, 고위 관료, 정치지도자, 재벌 오너, 강남 부유층들의 전유물일까. 이른바 지배계층만의 잘못으로 지금 우리 사회가 분열과 증오와 정체의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는 것일까?
안티의 안티를 하겠다는 것은 친미와는 전혀 다른 발상이다. 그것은 은폐에 대한 문제 제기다. 강자 미국에 대한 성토 하나로 자국 내부의 문제를 감춰 버리는 비겁함에 대한 질타다. 지금 우리가 그와 같다. 대통령을 짓밟고 권력층, 부유층에게 침을 뱉는 정의의 목청 뒤에 국민의 자기 책임성, 자기 변화의 절박한 필요성은 슬그머니 감춰진다. 아울러 그 감춰진 면을 드러내고자 하는 목소리에게는 이른바 ‘가진자’ 편이라는 편가르기 멍에가 덧씌워진다. 대체 어디까지가 가진자, 기득권층일까.
한국의 경제성장은 국가 주도로 추진됐다. 민주화는 민중의 집단적 열망으로 가능했다. 하지만 선진사회 도약은 시민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자기 각성과 책임감의 공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21세기 한국 탐험에서 최고의 연구 대상은 바로 남 탓에 골몰하는 국민이 아닐까.
김갑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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