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6.05 17:40
수정 : 2007.06.05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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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구용/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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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국가폭력이 국가가 시민에게 행사하는 폭력이라면, 학교폭력은 학교가 학교 구성원에게 가하는 폭력을 가리키는 말이어야 한다. 그런데 교육인적자원부가 전쟁을 선포한 학교폭력은 문제 학생이 일반 학생에게 행한 폭력을 가리키는 말로 위장된다. 공론장에서 국가폭력이라는 개념이 사용된 것은 2000년 전후다. 정당한 국가권력조차도 폭력의 주체일 수 있다는 생각과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권이 인정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사용된 학교폭력이란 말은 학교가 폭력의 주체일 수 있다는 생각을 불온시하는 사람들의 용어였다.
국가폭력과 마찬가지로 학교폭력도 몇몇 구성원의 특권을 위해 다른 구성원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데서 시작된다. 강요된 자율학습이 대표적 예다. 학생은 방과 후 시간을 다양한 장소에서 자신의 능력 개발과 꿈의 실현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학교 안에서의 교과학습만큼이나 학교 밖에서의 체험학습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요된 자율학습은 많은 학생들의 시간과 장소를 일부 학생의 교과학습 분위기를 위해 착취하고 통제한다. 강요된 자율학습은 단순히 타율학습인 것이 아니라 학교폭력이다. 늦은 밤 이유 없이 교실에서 졸고 있는 학생들은 모두 학교폭력의 희생자들이다.
학교폭력은 시간과 장소의 통제를 넘어 욕망을 감시하고 조작한다. 학교는 인성교육의 이름으로 욕망을 순화시킨다. 이는 욕망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인정받아야 올바로 실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정당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말하듯 욕망을 제약하는 주체는 초자아(학교)가 아니라 학생이어야 한다. 따라서 교육은 학생이 초자아와 욕망을 중재하는 자율적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이어야지, 욕망을 직접 통제하는 초자아의 훈육 체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초자아인 학교가 학생의 욕망을 직접 통제하는 것은 학생을 노예로 만드는 폭력일 뿐이다.
초자아의 욕망 통제는 욕망 조작을 통해 실현된다. 욕망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학교는 오직 경쟁에서 승리하여 성공하라는 지배충동만을 허용한다. 성적 향상에 기여하지 못하는 다양한 욕망들은 무가치한 것으로 거세시킨다. 그리고 이 무가치한 욕망을 실현하느라 성적이 뒤처진 학생을 문제아 혹은 천민으로 멸시한다.
무시와 멸시의 그늘에 감금된 학생은 어떤 방식으로든 인정투쟁을 해야 한다. 욕망의 조작과 관리에 저항하고 저지당한 자신의 욕망을 학교가 인정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지배충동에 길들여진 학생은 학교를 상대로 인정투쟁을 벌이기보다 복수를 꿈꾼다. 더구나 복수는 폭력의 주체인 학교가 아닌 힘이 약한 학생을 대상으로 삼는다. 복수는 결국 폭력으로 약자를 지배하는 또다른 폭력인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초자아가 강요한 지배충동에 예속된 학생들의 폭력은 학교폭력을 폭로하기보다 은폐한다. 이는 독일의 소외계층이 자본과 나치가 연합한 국가폭력에 저항하지 않고 힘없는 유대인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과 닮은꼴이다.
학생폭력은 학교폭력이 아니라, 학교폭력이 조장한 자연(지배)충동의 파괴적 폭동이다. 학교 구석구석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하고, 교사·학부모·경찰이 합동작전을 펼친다고 진압할 수 있는 폭동은 더더욱 아니다. 학생폭력 방지는 학교폭력 근절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를 위해 학교는 모든 학생들이 각자의 능력과 이상에 따라 자신의 욕망을 창조의 밑거름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교육을 제공해야만 한다. 그러나 학교, 교사, 학부모, 나아가 온 사회가 학생폭력에 흥분하면서도 학교폭력에는 무관심하다. 혹시 그들 모두가 학교폭력의 동조자이기 때문은 아닌가?
박구용/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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