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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6.14 18:34 수정 : 2007.06.14 18:34

조효제/하버드대 로스쿨 펠로

세상읽기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지난달 사임을 발표한 직후 미국에 와서 마지막으로 부시를 만났을 때다. 백악관 바깥에서 시위대의 함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는 “역사가 나를 평가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옛날 생각이 났다. 1990년 11월22일 마거릿 대처 총리가 사임하던 날 나는 영국에 잠깐 머무르던 중이었다. ‘매기(대처의 애칭), 이번 성탄절엔 누가 초대해 주나?’라던 길거리 낙서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97년 5월2일 블레어가 취임하던 날에도 나는 런던에 있었다. 18년 만에 노동당이 집권하자 국외자이지만 감개가 무량했다. 영국 노동당이 ‘뭐 그리 대수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새 노동당에 거는 대중의 기대가 높았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오늘날 영국인들은 블레어의 십년을 어떻게 볼까? 누구를 평가할 때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우선, 그 사람이 설정한 전제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근본적인 철학논쟁이 된다. 다음, 전제는 일단 접어두고 그 안에서 평가하는 방법도 있다. 새 노동당의 전제는 대처리즘의 틀 안에서 사회정의와 경제번영을 추구하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봤을 때 영국 내 중도 및 중도좌파는 사회정책 분야에서 블레어에게 우·미·양 정도의 점수를 준다. 실업률과 어린이 빈곤이 개선되고 최저임금제가 도입되었다. 공공 서비스의 예산도 늘어났다. 예컨대 영국 복지제도의 핵심인 국립보건제도의 예산이 십년 전보다 세 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것을 폴리 토인비는 “비밀리에 사회정의를 추구했다”고 표현한다. 지속적인 성장과 낮은 이율로 경제환경이 워낙 좋았던 덕도 많이 봤다. 그러나 유엔인간개발지수는 떨어졌고 청소년의 임신율·음주율은 유럽 최고 수준이며 집값도 천정부지로 뛰었다. 정치영역에선 북아일랜드 상황을 정상궤도에 올려놓은 게 눈에 띈다. 좌파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교수도 이 점을 높이 친다. 지방분권, 인권법, 동성애자 권리, 여성 의원 비율, 범죄율, 중앙은행 독립도 무난한 평을 받는다. 하지만 대외정책 중 특히 이라크전은 낙제 정도가 아니라 ‘출교’ 수준이다. 부시의 공격견이 되어 불법 전쟁으로 중동에 비극을 가중시키고 국제질서를 헝클어 놓은 것은 정말 용납하기 어렵다. 나는 부시와 블레어가 전범으로 국제법정에 서는 날까지 학생들에게 인권을 떳떳하게 가르칠 자신이 없다.

블레어의 실험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첫째, 신자유주의 시대에 진보세력이 선거정치에 임할 때 취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에 대해 숙제를 던졌다. <가디언>이 지적하듯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진보세력은 흔치 않은’ 법이다. 대세 속에서 차선을 추구할 것인가, 전혀 새로운 정책동맹 세력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인가? 둘째, 유권자는 효율성과 정당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정치를 평가한다. 대중은 먹고사는 문제에 집착하는 것 같아도 어느새 도덕적 분노를 터뜨리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경제에 민감하다. 블레어는 경제 효율성의 곡선 위에서 자만하다 이라크전으로 인해 정치 정당성의 곡선이 휘어지는 변곡점(티핑 포인트)을 만나 끝내 수렁에 빠졌다. 셋째, 블레어는 능란한 미디어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대중은 그의 훤칠한 신언서판에 매력을 느끼긴 했지만 그를 진심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이미지에 의존하는 정치인은 상승과 추락 사이의 낙차가 크기 마련이다. 넷째, 정치에서는 지도자의 개인 소신도 중요하다. 블레어는 사임 연설에서도 ‘내 진정성을 믿어 달라’고 끝까지 우겼다. 정치인에게 자기확신은 존재의 핵이지만, 번지수가 틀린 소신은 당과 국가와 인류에 재앙의 씨가 될 수 있다. 블레어의 그릇된 신념으로 말미암아 이라크는 그의 정치적 묘비명이 되었다.

조효제/하버드대 로스쿨 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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