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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6.17 17:09 수정 : 2007.06.17 17:09

나희덕 시인·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

세상읽기

종강 무렵이지만 인문학 전공 교수들의 몸과 마음은 여느 때보다 분주하다. 한달 전 교육인적자원부가 발표한 ‘인문학 진흥 기본계획’ 때문이다. 향후 10년 동안 4000여억원의 예산을 인문학에 투여한다니 이 사업에 선정되느냐의 여부에 따라 각 인문대학의 사활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가장 핵심적인 사업인 ‘인문한국(Humanities Korea) 프로젝트’는 거점연구소 10곳을 선정하여 1년에 10억원 이상 지원을 한다.

국가가 이렇게라도 나서서 인문학을 살려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은 우선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문학이 긴급한 수혈이나 구휼미가 필요할 만큼 위기에 처한 현실을 확인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몇 해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문학회생 프로그램’을 들고 나왔을 때도 ‘회생’이라는 말을 통해 우리가 환기해야 했던 것은 ‘문학의 죽음’이라는 풍문이었다.

그런데 이 막대한 지원이 예술이나 인문학의 토양을 근본적으로 살리는 데 기여하려면 조금 다른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우선, 사업의 규모와 성격에 비추어 일정이 너무 급박하다. 5월에 위원회를 구성하고, 세부 사업을 6월 안에 확정하고, 두 달의 공모기간을 거쳐 8월에 마감하고, 10월에 선정·협약이 이루어진다니,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식이다. 더욱이 이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학제적이고 융합적인 연구를 제대로 실현하자면 다양한 분야의 토론과 모색이 필요한데, 두 달이라는 기간은 밑그림을 그리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일정보다 더 큰 문제는 선정 기준이다. 한국학술진흥재단(학진)은 거점연구소를 선정하는 기준으로 철저하게 ‘선택과 집중’을 내세우고 있다. 선택과 집중은 경영학에서 강조하는 차별화의 전략인데, 이런 기준이 인문학에서도 서슴없이 적용된다는 사실이 내게는 당혹스럽기만 하다. 설명회에서 사업단장은 ‘안배·분할’하면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내세우며 지금은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지방대에 대한 특별한 배려는 없으며, 연구소의 시설이나 규모가 심사에 포함되므로 대형 연구소가 진입하기 쉬울 거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물론 인문학의 자생력을 확보하고 세계에 내로라할 거점연구소를 육성한다는 취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지방대 인문학 교수로서 무조건 나눠먹기 식의 안배를 기대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두뇌한국(BK)21 사업 이후 심각해진 학문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이번 사업으로 인문학의 극단적인 양극화를 가져오리라는 건 너무도 분명한 일이다. 전임연구원을 한 명도 확보하지 못한 지방대 인문학연구소에서는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사업 신청은 고사하고 정원을 채우지 못해 인문대학 자체가 문을 닫을 날이 멀지 않았다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는 게 지방대의 현실이다.

자연의 생태계와 마찬가지로 ‘문화생태계’의 생명력은 다양한 문화주체가 공존할 때 유지될 수 있다. 그런데 문화의 기본적인 토대를 제공하는 인문학에서조차 선택과 집중에 의한 효율성만이 강조된다면 문화생태계는 기형적 구조를 지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로 양극화를 들지만, 그것은 경제적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분야별 경쟁에서 실용학문에 밀린 인문학이 이제는 내부의 또다른 양극화를 강요당하고 있는 셈이다. 경제만능주의를 극복해야 할 인문학에 대한 지원책이 오히려 그것을 답습하는 한 인문학의 미래는 막대한 투자로도 밝아지기 어렵다.

나희덕 시인·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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