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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구용/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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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끔 서울까지 가는 것은 정겨운 만남도 있고 새로운 소통도 있기 때문이다. 될수록 많은 학회에 참석하고 싶지만 오히려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 가족회의처럼 느껴지는 학회에 참석하지 않으면서부터다. 점잔을 빼며 제 이름 걸고 토론하다 쉬는 시간이나 뒤풀이에서는 서로 형이 되고 가족이 되는 학회가 많다. 형이라 부를 선배가 없는 사람은 이방인이 된다. 남의 집에 자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왜 학회조차 가족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학벌은 왜 가족과 은밀히 결합하는가?
인간(人間)은 사람 사이에서 사는 존재, 곧 사이존재다. 사이는 문(門)을 통해 빛(日)이 들어오는 틈이다. 틈사이가 없으면 빛도 삶도 없다. 문이 있어야 틈사이가 생기듯, 집이 있어야 문도 있다. 문 없는 집이 없듯이 집 없이는 문도 없다. 사이존재인 인간이 집에 무리 지어 사는 것(가족)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그러나 가족의 문은 견고해서 틈사이가 좁고, 그만큼 빛과 사람이 안팎을 넘나들 자유가 많지 않다.
사람은 안(內)과 바깥(外)의 어느 한쪽에서만 살 수 없다. 안사람과 바깥사람이 따로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안사람은 아내를 의미하며, 아내는 ‘안의 해’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은 가족주의자들의 대표적 거짓말이다. 가족을 대표하는 사람은 안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바깥사람이다. 실제로 안사람은 안의 주인을 상징하는 해가 아니라, 안에 감금된 여성 노예를 뜻하는 말이다. 그 때문에 안팎을 분리하는 사이(內外之間)에는 사람은 없고 주인과 노예만 있다. 내외지간을 연결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명령과 복종, 그리고 공포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두 남녀 사이에서 태어나지만 누구도 그 사이에 머물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는 두 사람이 메워야 하며, 아이는 그들뿐만 아니라 새 사람과 새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러나 두 남녀가 내외가 되는 순간, 그들을 묶어둘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식뿐이다. 내외지간에는 자식만이 넘어설 수 있는 신분상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자식 없는 가족을 비정상으로 보는 이가 많다. 이들의 병든 눈에 한 부모 가정, 소년소녀 가정, 동성 가정 등이 결손가정으로 비치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공동체는 다양한 역할을 구성원에게 부여하고, 그 몫을 적절하게 수행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가 아닌 남이라고 부른다. 그 대신 현대사회는 역할 교환의 자유를 최대한 허용한다. 그러나 가족 안에서 주어진 역할은 쉽게 바꿀 수 없다. 태어남과 동시에 자연의 기준에 따라 역할이 주어지며, 그에 따른 결속의 힘도 강하다. 그 때문에 강자들은 자기들끼리 가족관계를 맺어 계속 힘을 행사하려고 한다.
사람은 끝없이 새 관계를 맺으며 그 사이에서 살아가야 한다. 관계의 수만큼 내가 속한 공동체와 그것이 요구하는 역할의 수도 늘어난다. 나는 역할의 덩어리다. 모든 역할을 제거하면 나도 사라진다. 공동체적 관계나 역할 없이 나 홀로 살 수 없지만, 역할에 짓눌린 삶에도 나는 없다. 따라서 주어진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며 자기가 원하는 역할을 스스로 찾아가는 힘이 있어야 한다. 스스로 역할을 바꾸고 가꾸는 과정에서 참살이가 가능하다.
그러나 형님의 나라, 한국에서는 모든 역할이 가족관계의 역할로 대치된다. 온 나라 사람이 형이고 형님이다. 사석은 물론이고 방송프로에서조차 형님 소리 듣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학자부터 조폭까지, 대낮부터 늦은 밤까지 형님들이 넘쳐난다. 형님 없는 학자는 학회도 갈 수 없다. 학벌이 가진 권력에의 의지가 피로 묶인 관계(혈연)를 통해 실현되기 때문이다.
박구용/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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