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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8.07 17:54 수정 : 2007.08.07 17:54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

세상읽기

가톨릭 개혁의 상징적 인물인 루터는 교회의 타락을 비판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성경을 독일어로 처음 번역한 것이다. 루터는 자신이 피신해 있던 성 밖으로 나가 거리의 아이들과 시장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을 배워 성서를 번역한다. 그때부터 독일인은 자신의 말로 성서를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와 사제가 독점했던 성서 해석의 권위는 이제 시민들의 공유물이 되었다. 누구나 자유롭게 신과 만나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루터의 성서 번역이 기독교를 심판과 율법의 종교에서 사랑과 자유의 종교로 바꾼 것이다. 더구나 아직 통일된 언어 체계를 갖추지 못했던 독일어는 이제 보통사람의 삶과 소통하는 언어가 되었다. 그의 외출은 독일 철학, 독일 문학, 독일 역사, 한마디로 인문 독일의 첫걸음이었다.

지난해 9월 전국 인문대 학장들이 모여 ‘인문학의 위기’를 선언했다. 그리고 올해 5월 교육부는 ‘인문학 진흥 기본계획’이라는 처방전을 내놓았다. 10년간 인문학 연구와 교육, 사회참여에 4000억원을 투입한다는 내용이다. 그중에 가장 많은 예산이 배정된 ‘인문한국’이라는 연구소 지원 계획이 얼마 전에 발표되었다. 국제적 경쟁력을 가진 거점연구소 20여 곳을 집중 지원한다는 것이다.

과연 교육부가 제시한 처방전이 인문학을 위기에서 탈출시킬 수 있을까? 처방전에 대한 의문은 진단서에서 시작해야 한다. 잘못된 진단에 기초한 처방은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병을 만들기 때문이다. 진단을 하려면 증상을 알아야 한다. 인문학 위기의 증상은 인문학자들의 통증에서 감지된다. 이들의 통증은 시민과 학생들의 인문학에 대한 무시와 기피에서 비롯된 듯하다. 그런데 왜 무시하고 기피하는가? 인문학이 시민들의 통증 호소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상처에 등 돌린 인문학이 고통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인문학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틈사이로 들어오는 빛과 어둠을 철학, 역사, 문학의 이름으로 감별하는 학문이다. 빛 속에 은닉된 어둠을 비판하고 치유하면서, 어둠 속에 갇힌 빛을 광장으로 불러내는 학문이다. 그 빛으로 틈사이에서 씨 을 찾아 가꾸는 인문학만이 꽃을 피울 수 있다. 따라서 인문학은 무엇보다 틈사이에 거주해야 하며, 이를 위해 끝없이 자기 세계의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의 인문학은 바깥세상으로 향하는 모든 출구가 차단된 성 안에 피신하고 있다.

출구 없는 성에는 입구도 없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처럼 커다란 곤충이 된 인문학은 대학이라는 철옹성 안에 갇혀 죽어가고, 인문학과 만남을 허가받지 못한 채 성 밖을 서성이는 사람들은 야수처럼 서로를 갉아먹는다. 사람의 무늬(인문)가 없는 세상은 동물들로 넘쳐난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망각한 야수들이 무한경쟁을 벌이는 들판에도 푸릇한 웃음과 설움이 어우러져 있다. 그 사이로 다리를 절며 걸어가던 시인 이상화처럼, 시장에서 성경을 다시 읽은 루터처럼 바깥으로 나가는 인문학만이 사람의 무늬가 아름답게 새겨진 인문 한국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은 대학의 바깥에서 언제나 씌어지고 있다. 가련한 안락을 대가로 자유를 저당 잡힌 사람들, 비정상과 무능력의 이름으로 감금되거나 사회보장의 수혜자로 전락한 사람들, 학벌·재벌·직벌·미벌에 쏘여 상처받은 영혼들, 언어를 빼앗긴 모든 존재가 호소하는 통증을 받아쓰는 것이 인문학이다. 인문 한국을 위하여, 피땀으로 얼룩진 종이에 사람들의 웃음과 울음을 받아쓰겠다는 학자들과 그들의 연구소를 지원해야 하는 이유다.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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