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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8.12 18:06 수정 : 2007.08.23 18:19

홍은택/NHN 이사

세상읽기

1면 기사만 보면 <뉴욕타임스>보다 <월스트리트저널>이 더 좋은 것 같다. 타임스 기사들은 뉘앙스가 풍부하고 다양한 소재와 관점을 제공한다. 그러나 단어를 아껴 쓴다는 느낌은 많이 받지 못했다. 반면 저널 기사의 문체는 간결하고 함축적이어서 힘있고 정확한 언어를 구사한다. 나뿐만 아니다. 타임스의 경영진도 왜 저널처럼 기사를 쓰지 못하느냐고 자사 기자들을 다그친다고 들었다.

저널의 다른 특징은 기사와 논설의 부조화. 논설은 선동적일 만큼 자극적이고 화려한 문체로 시장만능주의를 전파한다. 그러나 기사는 진보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우 자유롭다. 엔론의 회계부정 스캔들은 저널의 조너선 웨일 기자의 첫 보도로 촉발됐다. 저널의 고참기자인 레베카 스미스 등은 집요한 후속취재로 엔론을 파국으로 몰고 갔다. 그동안 내 기억에 저널은 엔론 사태를 덮기 위한 사설을 대여섯 번 실었다. 2004년 발표된 ‘미디어 편향성의 척도’라는 논문을 보면 미국의 주요 언론사 20곳 중 가장 리버럴한 언론사는 뜻밖에 저널이었다.

이런 부조화는 논설과 기사를 교회와 국가처럼 엄격히 구획하는 데서 비롯한다. 저널의 편집국과 논설실은 남북한처럼 대치하고 있다는 평도 있다. 최근 루퍼트 머독이 저널을 발행하는 다우존스사를 5조원에 사들이면서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머독은 보수 성향으로 알려져 있고 지나친 상업주의로 비판받는 인물이다. 논란의 초점은 편집국과 논설실을 가르고 있는 100여년의 벽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 벽은 기자들에게 상상력을 발휘하고 취재 의욕을 불태울 넓은 공간을 보장해 왔다.

그 공간의 폭을 말해주는 예가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가르치고 있는 켄트 맥두걸 명예교수다. 그는 1972년까지 10년 동안 저널에서 일했다. <엘에이(LA)타임스>를 끝으로 25년 동안의 기자생활을 마친 그는 사회주의 잡지 <먼슬리 리뷰>의 88년 11월호에 ‘부르주아 언론사 내부에 파고들어서’라는 글을 싣고 자신이 사회주의자였음을 공개했다. 이념 편식이 심한 미국 언론계가 뒤집어졌다. 노엄 촘스키는 “내가 알기로 미국 언론사에 사회주의자인 기자는 단 한명도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맥두걸은 저널 입사 전부터 연방수사국의 요시찰 대상이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저널에 숨어 있을 수 있는 다른 사회주의 두더지들을 색출하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일한 에디터들의 반응은 일관되게 “그가 사회주의자라는 것을 당시에 알았다고 해도 그의 기사가 문제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맥두걸 자신도 “저널 기자는 아무리 사소한 사실이라도 잘못 나가서는 안 된다는 공포 속에 살고 있다”고 썼다. 그만큼 편집국 안의 공간도 넓고 이념적 편향을 걸러낼 수 있는 내부 장치도 잘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머독은 자신의 입성으로 그 공간이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데 대해 “어떤 간섭, 아니 간섭의 어떤 암시라도 있다면 저널과 독자의 신뢰를 무너뜨리게 될 것이며 나 스스로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덧붙인 말이 더 의미 있다. “공공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을 떠나서, 그렇게 하는 것은 사업적으로 나쁜 일이다.” 역시 사업가다운 관점이다. 저널에서는 편집 독립을 보장하고 그로 인해 독자의 신뢰를 지킬 수 있다면 간섭하지 않는 게 돈 버는데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저널의 기사가 팔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신뢰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머독은 이런 말을 듣는지도 모른다. “머독은 저널을 경영하기에는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적이다.”

바로 사회주의자 맥두걸이 한 말이다. 누구의 말이 옳은 것으로 판명될 것인가.


홍은택/NHN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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