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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8.19 18:02 수정 : 2007.08.19 18:02

나희덕/시인·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세상읽기

탈레반에 납치되었던 인질들 가운데 두 사람이 무사히 귀국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건강상태는 양호한 편이라고 하지만, 두 사람의 굳은 표정에는 죽음의 공포를 겪어낸 흔적이 역력했다. 그들에게는 살아 돌아왔다는 안도감보다 아프간에 남아 있는 19명의 동료들에 대한 걱정과 부채감이 더 클 것이다. 더욱이 뒤이은 협상이 결렬된 이후 탈레반은 한국 정부가 미온적인 태도로 나온다면 추가로 인질을 살해할 거라는 경고를 보내왔다.

그런 착잡함 속에서도 한 줄기 빛처럼 우리는 서늘하고 숙연하게 만든 소식이 있었다. 한국인 인질들을 납치한 탈레반 사령관이 한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는, 석방 대상으로 지목된 두 여성 중 한 명이 자신보다 더 아픈 사람을 풀어주라며 석방 기회를 양보했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양보를 잘하던 사람도 막다른 상황에서는 제 살길을 찾는 게 일반적인데, 총구 앞에서 그런 배려와 사랑을 보여주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탈레반 사령관은 깊은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지만, 불행하게도 그 감동이 인질 석방의 드라마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작년 가을 미국의 아미쉬 공동체 마을학교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한 트럭 운전사가 교실에 침입해 인질극을 벌였는데, 인질로 잡힌 11명의 여학생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가 나서서 자신을 쏘는 대신 어린 동생들을 풀어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인은 학생들을 차례로 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폭력을 실제적으로 돌이키지는 못했지만 열세 살 소녀의 용기와 희생은 아미쉬 공동체의 정신적 저력을 잘 말해주는 듯하다. 현대문명과 폭력의 본산지인 미국에서 그들이 삼백 년 전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공동체적 연대 속에 살아갈 수 있는 것도 그런 신념과 교육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감동의 순간은 짧고 환멸은 끝이 없다.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테러와 전쟁을 지켜보면서 왜 이 문명은 인간을 풍요롭게 하기보다는 더 불행하고 불안하게 만드는지 반문하곤 한다. 세상은 얼핏 무기와 권력을 손에 쥔 자들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가장 저열하고 위험한 생존의 몸부림을 하고 있는 패자들에 불과하다. 그들은 총으로 자기 앞의 인질을 죽일 수는 있지만, 인간의 영혼까지 파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관용, 겸손, 평화, 연대 … 세계가 급속하게 잃어가고 있는 이러한 덕목들은 오늘날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에게나 간신히 남아 있는 듯하다.

탈레반에 잡혀 있는 19명의 한국인들은 지금도 총구 앞에서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기 위해 싸우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정부 차원에서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어야 할 것은 물론이지만, 우리는 그 사람들을 단순히 수동적인 억류자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는 불의한 폭력 앞에 무릎 꿇지 않고 하루하루 생존하는 것이 지난한 싸움일 것이다. 동료에게 석방 기회를 양보한 한 여성의 이야기는 그녀가 고난의 주체로서 죽음의 공포를 잘 이겨내고 있다는 청신호로 읽을 수 있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시민군을 지휘하는 퇴역장교가 자신의 옛 동료였던 공수부대 여단장에게 던졌던 대사가 문득 떠오른다. “총칼보다 무서운 게 뭔지 아나? 그건 바로 사람일세.” 5월 광주를 끝까지 지켰던 것도 택시 운전사나 식당 주인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총구 앞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켰던 사람들, 그들이 믿었던 것은 자기 안의 ‘짐승’이 아니라 ‘신’의 얼굴이었다.

나희덕/시인·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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