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구용/전남대 철학과 교수
|
세상읽기
안녕하세요? 예의 바르고 심지가 곧은 선생님에게 인사를 했다. 되묻기가 아닌 끝내기 억양으로 ‘예’라는 답례가 돌아왔다. ‘굿모닝’에 ‘예스’라고 답한 꼴이다. 무심코 주고받은 인사말에는 나와 그분 사이의 권력관계가 은밀하게 표현되어 있었다.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며, 현대인의 관계는 만남과 소통을 통해 맺어진다. 인사는 모든 만남의 시작이고 끝이다. 굿모닝-예스처럼 비대칭적 인사말로 시작된 만남은 인격과 인격이 아니라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관계를 요구한다. 윤리적 인사는 상황·목적·상대에 맞는 말을 택하는 데서 시작되지만 그보다 상호존중이 먼저다. 상호존중 없이 일방적 존경을 요구하는 인사는 도덕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이다.
정치적 위계는 인사말에서보다 소통과정에 더 깊숙이 침투해 있다. 학교에서 학생은 ‘나/저’를 주어로 사용하지만, 선생은 한사코 ‘선생님’을 주어로 쓴다. 아버지도 ‘나’를 말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과 선생님 혹은 아이와 아버지가 만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삼인칭 단수로 표현된 선생님과 아버지는 비판할 수 있지만 비판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이런 소통은 대화를 가장한 명령체계일 뿐이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에비’라는 말은 아이들의 행동을 멈추게 하거나 금지시키는 공포의 언어였다. ‘에비!’ 소리에 아이들은 장난이나 울음을 멈추어야 한다. 통설에, 에비라는 말은 아비(아버지)에서 왔다지만 확실치 않다. 분명한 것은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아버지는 에비처럼 공포의 언어였다. 1960년대 말 한국 문단을 떠들썩하게 했던 ‘불온시 논쟁’은 이어령이 에비를 유아 언어라고 단언한 데서 시작됐는데, 사실 에비나 아버지는 아이들의 말이 아니라 아이를 통제하는 어른의 말이다.
한쪽은 존댓말을 해야 하고 다른 쪽은 반말을 해도 되는 한국사회를 비판하면, 사람들은 으레 문화적 차이를 무시하는 사대주의라며 거세게 반발한다. ‘굿모닝-예스’는 실례지만, ‘안녕하세요-예’는 예절이기 때문에 서로의 문화적 차이를 존중하라는 그럴듯한 주장도 곁들인다. 한국에서 양옥이라 불리는 집들은 대개 지붕이 없는데, 실제로 서양에는 그런 집이 없다. 지붕 없는 양옥은 서양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이다. 한국사회에 만연한 개인주의 역시 서양에 없는 온전한 한국산이다. 그렇지만 비대칭적 인사말과 위계적 소통방식은 한국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서양 사람들은 서로 존댓말을 하거나 반말을 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전통은 아니다. 그들도 60년대 중반까지는 우리처럼 한쪽이 존댓말하고 다른 쪽은 반말을 했다. 서양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문화권이 유사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의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굿모닝-예스는 결코 우리의 말이 아니라 세계에 퍼져 있는 에비의 말이며 힘있는 권력자의 말이다. 어떤 곳에서는 사라지고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유지되는 것이 차이일 뿐이다.
뉴욕에서 자란 어떤 동포 학생이 서울 거리에서 미국식으로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했단다. 두 문화의 차이에 대한 무지 때문에 그는 한동안 미친놈 아니면 거지로 오해받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말의 복잡한 경어법을 배우지 못한 외국인도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언어나 문화의 차이는 배우고 읽히면 된다. 그때까지 작은 실수나 실례를 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그러나 안녕하세요에 예라고 답하는 것은 처음부터 인격적 만남과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큰 실례이자 세계의 웃음거리다.
박구용/전남대 철학과 교수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