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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구용/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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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어갔다. ‘10·4 평화번영 선언’ 2항이 확인하듯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한 것이다. 이 세상을 등지고 저세상으로 날아간 초월이 아니라, 나의 바깥에 있는 너에게로 걸어간 초월이다. 바깥은 언제나 무지의 세계이며, 그래서 불안과 공포의 원천이다. 걸어서 바깥으로 나가는 초월이 불안과 공포에 맞설 용기를 가진 자유인의 몫인 까닭이다.배운 것이 많은 사람들 중에 통일이 꼭 필요하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어떤 이는 통일을 민족주의라는 낡은 이데올로기의 부산물쯤으로 폄하한다. 실제로 ‘민족=국가’의 등식에서 남북통일의 정당성을 외치는 사람이 많다. 그 때문에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적 국가주의가 만들어낸 관념적 허상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통일에 대한 냉소는 어쩌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통일은 남북이 한 민족이기 때문에 지향해야 할 관념이 아니다.
남북은 한겨레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만들어온 삶과 생명의 공동체다. 그렇다면 왜 분단을 넘어 통일인가? 남북은 서로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율적으로 분가한 것이 아니라, ‘홀로주체’를 꿈꾼 제국주의와 냉전주의가 지배와 약탈을 위해 강제로 쪼개고 분리한 것이다. 한반도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내다버린 쓰레기의 집결지가 되었고, 20세기 인류가 저지른 모든 전쟁과 폭력의 하수구인 38선을 사이에 두고 분단된 것이다. 따라서 통일은 자유와 평화를 지향하는 세계의 ‘서로주체’들이 함께해야 할 쓰레기 분리수거이며 하수구 청소인 것이다.
‘6·15 공동선언’ 이후 통일 담론은 크게 ‘흡수 통일론’, ‘우리주의 통일론’, ‘평화주의 통일론’으로 나뉜다. 먼저 ‘흡수 통일론’은 서로 모순된 두 개념을 제 맘대로 조합시킨 홀로주체의 전략적 이데올로기다. 흡수가 너(다름)를 나(같음)에게 동질화시키는 폭력이고 약탈이라면, 통일은 너와 함께 걷기 위해 나를 이질화시키는 자기변혁이고 창조적 초월이다. 따라서 홀로주체가 자본의 배후 조정을 받아 성취하려는 흡수통일은 사이비 통일인 것이다.
‘우리주의 통일론’도 민족이라는 거대한 홀로주체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기는 마찬가지다. 남과 북은 우리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의 바깥에 있다. 우리는 함께할 수 있지만,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타자성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서로를 ‘우리 안의 타자’로 인정할 때에만 통일은 동질화의 폭력이 아니라 서로를 주체로 만드는 평화의 과정이 될 수 있다. 타자성 없는 우리끼리의 통일은 차이를 무시하고 억압하는 동일(同一)일 뿐이다. 거꾸로 우리는 없고 타자만 있는 통일은 전쟁의 전리품이 된다. 그렇다고 ‘평화주의 통일론’이 곧바로 대안은 아니다. 서로주체만이 아니라 홀로주체도 평화를 노래하기 때문이다.
홀로주체에게 전쟁과 평화는 적대적이라기보다 상보적이다. 홀로주체는 나와 우리의 이익을 위한 전쟁조차 평화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반면 서로주체에게 평화와 통일은 상생한다. 평화와 통일은 목적과 수단으로 분리되지 않고 둘 다 목적이면서 과정이다. 통일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따로 또 함께’ 걸어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 길에서 평화를 꿈꾸는 사람들은 누구나 연대해야 하며, 심지어 평화의 적과도 만나서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정전체제를 종식하고 항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4자 정상이 만나야 하는 이유다. 만남에 앞서 그들이 원효의 큰마음(一心) 사상과 헤겔의 큰이성(정신) 철학을 공부했으면 한다. 원효와 헤겔은 통일신라와 독일의 분열 때문에 고통받는 민중의 신음 소리에 응답한 세계의 철학자들이기 때문이다.
박구용/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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