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구용/전남대 철학과 교수
|
세상읽기
미성년자들에겐 이상으로 현실을 재단하거나 통째로 부정할 특권이 있다. 그래선지 그들에겐 투표권이 없다. 현실을 모르는 이상은 급진적이고 아름답지만 꼭 그만큼 맹목적이고 공허하다. 꿈을 꾸려면 잠들어야 하지만, 어설픈 잠은 가위눌림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그들의 이상이 현재보다 미래의 현실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 성인이 된다는 것은 이상을 버리고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한낮에 꿈꾸는 사람처럼 조롱받기 일쑤다. 문제 찾기에 앞서다 보면 어느 순간 문제 있는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억압적 질서와 교묘하게 조작된 지배체계를 들춰내 비판하면 몽유병자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이렇게 저렇게 돌부리에 치여 넘어지고 강물에 빠져 허우적대다 많은 사람들이 냉혹한 현실에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는다. 가련한 안락을 대가로 자유를 반납하는 것이다.
반면 현실과 타협할 수 없는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현실과 맞설 용기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미성년 상태로 다시 돌아간다. 나이와 지성은 성숙했지만 심리적으로 미성숙한 이들 겁쟁이들은 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패배주의자로 전락한다. 완전한 사랑을 꿈꾸면서 실제로는 어떤 사랑도 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이들은 이상세계의 안락의자에서 현실을 향해 한 발짝도 내딛지 않는다. 이런저런 사랑들이 완전하지 않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듯이, 이들의 눈에는 부당한 권력에 복종하는 것과 저항하는 것의 차이조차 보이지 않는다. 패배주의자의 눈빛은 언제나 냉소로 빛난다.
차이에 둔감한 냉소적 이상주의는 현실의 변화에 무관심하다. 한나라당과 통합신당은 차이가 없기 때문에 누가 집권하든 관계없다는 생각은 살만한 사람들만 즐길 수 있는 관념적 유희다. 유럽의 이념정당들과 비교하면 두 당의 이념과 정책은 다름보다 같음이 많을 수 있다. 그렇다고 무시할 만큼 차이가 사소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섣부른 이상주의자들은 자본과 민중이 뚜렷한 전선을 형성하려면 한나라당이 집권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이상세계에 몸을 숨기고 있으니 말조차 빼앗긴 민중의 탄식소리를 들을 수 없는 몇몇 지식인의 무책임한 발언으로 치부하기에는 지나치게 무지하고 미성숙한 태도다.
같음보다 다름을 알아야 정치의식이 성숙한다. 독재정부와 민주정부의 차이를 아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한나라당과 통합신당, 그리고 두 정당의 대통령 후보가 걸어온 길과 정치적 지향성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이미 성공한 20%만을 더 성공하게 만들 콘크리트 경제대통령과 남북이 소통하고 연대하며 함께 성장하는 평화대통령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경제를 정치에 종속시키면 평등이 부자유로 변질되지만, 그렇다고 한나라당 후보처럼 정치를 경제의 노예로 만들면 자유는 불평등과 동의어가 된다. 자유롭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려면 평화가 정치와 경제의 경계선에 있어야 한다. 부패한 성공과 향락의 경제가 판치는 대한민국을 원치 않는다면 현실의 교차로에서 이상을 찾아야 한다.
차이를 알고 투표장에 가는 것이 성숙한 시민의 태도라면, 그들이 투표하고 싶은 열망을 갖도록 희망을 제시하는 것은 정치인의 의무다. 선거는 편가르기지만 민주화된 사회에서 선거 때마다 이편 저편을 번갈아가며 투표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신한국당 지지자가 이름 바꿨다고 한나라당을 딴나라당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저편을 이편으로 만들기 위해 차이를 흐리거나 저편을 유혹하는 데 몰두하는 정치인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이편이 투표장에 갈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편이 희망을 가지고 투표장에 갈 수 있도록 차이를 명확하게 부각시키는 후보가 결국 시민의 선택을 받을 것이다.
박구용/전남대 철학과 교수
기사공유하기